바이러스 감염 경로 추적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더 사람들의 동선이 주목받는 시절이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동선은 좀처럼 박물관으로 향하지 않는다.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전시장이 자주 문을 닫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볼 것을 갈구하지만, 그 욕구는 박물관이 아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주로 채워진다. 그러나 내게 전시 관람은 무엇보다 직접 전시장에 가서 보는 행위이다. 그리고 관람은 전시물을 볼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전시장으로 걸음을 옮길 때 이미 시작된다. 디저트 타임이 디저트를 입에 넣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밥을 차리기 시작할 때 이미 시작되듯이. 밥과 반찬은 디저트를 만나러 가기 위한 긴 동선의 일부이다.
왜 디저트인가. 디저트를 먹는 일은 밥과 반찬으로만 연결되는 단선적인 숟가락질 동선을 흐트러뜨리고, 섭생으로만 정의되는 식생활에 제동을 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서평지 ‘서울리뷰오브북스’에서 건축가 강예린은 ‘단지 안-지하 주차장-엘리베이터-방화문-내 집 안’으로 연결되는 단선적인 동선을 어떻게 흐트러뜨릴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그래야만 “주거와 노동을 바싹 묶어버리고 쇼핑 이외에는 도시와 관계 맺지 않으려는 삶”에 균열을 낼 수 있으리라 전망한다. 나의 박물관행은 직장에서 집 안으로 연결되는 단선적인 동선을 흐트러뜨리고, 낯선 환경과 맺어지지 않으려는 게으름에 균열을 내는 행위이다.
그리하여 OTT 채널을 끄고 긴 시간 홀로 걸어, 닫힌 박물관 앞까지 다녀왔다. 그 행위만으로도 코로나19가 단순화시킨 내 동선에 균열을 낸 느낌이었다. 무엇인가 그 나름대로 충만한 것을 경험하고 온 느낌이었다. 실제로 박물관들은 전시실 못지않게 방문 동선에도 섬세한 배려를 해 놓은 경우가 적지 않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우만 해도, 지하철 출구에서 입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시판들과 잘 수집된 탑들이 관객들을 반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경우는 어떤가. 박물관 앞에 도착한 관객은 건물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길게 이어진 상향식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만 한다. 이 긴 계단은 박물관이란 일상의 공간과는 다른 곳이며, 그 공간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대기실이 필요하다는 선언과도 같다. 보행로와 박물관 입구 사이의 긴 상향식 공간을 통과하며 관객은 뭔가 경외감이 드는 대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지속적으로 하향하는 공간에서 인간은 우울감을 경험하기 쉽다. 바로 그러한 우울감을 경험하게끔 만든 작품이 미국의 예술가 브루스 나우먼의 ‘우울 스퀘어’(Square Depression)이다. ‘부정적 피라미드’라는 별칭에 걸맞게, 중심부로 걸어 들어갈수록 관람자의 위상은 낮아진다. 중심부에 도착한 관람자는 비록 무대의 중심에 있지만, 자신을 둘러싼 위압적인 불모의 환경으로 인해 우울감을 느끼게 된다.
동선의 중요성은 건물 안에 들어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에세이스트 스가 아스코는 18세기 이탈리아 건축가 조반니 피라네시의 ‘상상의 감옥’(Carceri d‘invenzione) 도판을 보면서 18세기 유럽의 굴절된 시대정신을 읽는다. 그 시대정신은 다른 무엇보다도 ‘상상의 감옥’에 펼쳐져 있는 동선에 구현돼 있다. “어딘가에서 내려오고,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도 못한 채 다시 한번 높은 데를 향해 상승하는 계단, 거의 필연성이 없는 장소에 만들어진 길이도 모양도 별개인 돌난간…. 거기서 드러나는 것은 오히려 의미 있는 듯이 그림 속에 놓인 고문 기구 자체보다 훨씬 끔찍한 고문이 아닐까 생각됐다.”
코로나19의 시대는 전에 없이 꼼꼼히 동선을 기록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 재난이 끝나고 많은 시간이 흐른 먼 훗날, 이 동선의 기록이야말로 이 시대를 증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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