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된 ‘자발적’ 이익공유제[여의도 25시/김지현]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26일 03시 00분


지난해 10월 7일 국회에서 열린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국정감사장 모습. 동아일보DB
지난해 10월 7일 국회에서 열린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국정감사장 모습. 동아일보DB
김지현 정치부 차장
김지현 정치부 차장
지난해 10월 7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국정감사장. 상임위 개의와 동시에 여야 의원들이 특정 기업의 실명까지 언급하며 질타에 나섰다.

“많은 기업이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상당한 매출 성장을 이뤘지만 농어촌상생협력기금 출자액은 저조하다. 특히 두산중공업은 2019년 매출액 15조 원 이상을 기록했지만 0.00001%보다도 적은 100만 원만을 출자했다. 이는 제도의 취지를 우롱하고 조롱하는 처사다.”

이날 여야 의원들은 주요 대기업 경영진을 증인으로 출석시켜 면전에서 ‘자발적 참여’를 촉구하기로 했다가 “팔 비틀기”라는 지적 속에 막판 철회했다.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는 “이때뿐만이 아니다. 20대 국회에서도 농어촌상생협력기금 목표치를 채우지 못했다며 국감 때마다 기업인들을 증인으로 불러들이자는 말이 나왔다”고 했다. 그는 “오죽하면 당내에서도 ‘미르재단’을 그새 잊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다”고도 했다.

미르재단 때는 어땠을까. 박근혜 정부가 만든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거액을 낸 것과 관련해 검찰에 참고인 신분으로 불려나왔던 A대기업 사장은 2016년 10월 검찰 특별수사본부 앞에서 취재진에게 “사회적으로 필요한 부분에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기업이 분담해 돈을 내는 것은 관례였다. (그것이) 사회에 부응하는 것으로 생각해 모금에 참여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다른 대기업 임원들도 뇌물 혐의를 피하기 위해 검찰 조사에서 “공익성을 가진 정부 기금에 선의로, 자발적으로 돈을 냈다”며 강제성을 부인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듬해 4월 박 전 대통령을 강요 등 18개 혐의로 기소했고 최근 대법원은 징역 20년에 벌금 180억 원을 확정지었다.

새해 벽두부터 민주당 이낙연 대표가 제안한 이익공유제에 재계가 또 한 번 발칵 뒤집힌 건 이런 정치권의 과거 전력 때문이다. 물론 이 대표가 처음 이 말을 꺼낸 배경에는 ‘선의’가 깔려 있었을 것이다. 이 대표는 11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코로나로) 많은 이득을 얻는 계층, 업종이 이익을 일부 사회에 기여해 피해가 큰 쪽을 돕는 방식은 도입할 만하다”며 “일부 선진국이 도입한 이익공유제를 강제한다기보다는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며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해 달라”고 했다. 선의를 토대로 한 자발성을 강조한 것.

하지만 이틀 뒤 당내 ‘포스트 코로나 불평등 해소 태스크포스(TF)’가 출범하고, 정치인들이 한 사람씩 숟가락을 얹기 시작하면서 논의의 흐름은 빠르게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TF 단장을 맡은 홍익표 정책위의장은 KBS 라디오에 출연해 SK그룹을 직접 언급했다. “SK처럼 대기업이나 일부 금융 쪽에서 펀드를 구성해 중소기업 등 어려운 계층에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사업 기획을 고민하고 있다”는 그의 발언에 민주당 주요 의원실마다 기류라도 파악하려는 대기업 대관 담당자들의 문의 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그 뒤로도 일주일 내내 모호한 이익공유제를 둘러싸고 기금 조성과 부유세 신설 등 각종 방안이 여권 안팎에서 쏟아졌다. 그리고 18일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으로 모든 것은 단박에 정리됐다.

문 대통령은 “코로나 속에서 오히려 돈을 버는 기업들이 출연해 기금을 만들어 취약계층을 도울 수 있다면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했다. ‘기금 조성’을 콕 집은 대통령의 말에 민주당도 부랴부랴 따라갔다. 민주당 TF는 정부가 일부 출연하고 민간의 자발적 기부로 상당 부분을 충당하는 기금 조성안을 마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이 이날 모범 사례로 소개했던 농어촌상생협력기금과 똑같은 방식이다.

결국 정치권력 앞에서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기업들은 검찰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이익공유제에 돈을 낼 것이다. 물론 자발적으로 말이다. 5년 전 미르재단과 4년 전 농어촌상생협력기금, 그리고 그에 앞서 만들어졌던 자발성을 강조한 여러 ‘준조세’ 앞에서 자유로웠던 기업은 없었다. 하물며 입법 독주로 경제 3법까지 기어이 통과시킨 이번 집권여당의 권유를 거부할 수 있는 기업이 과연 있을까. 철저한 편 가르기 논리로 우리와 함께 가는 ‘착한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을 구분 짓는 정권의 눈치를 안 보고 버틸 기업은 없을 것이다.

김지현 정치부 차장 jhk85@donga.com


#자발적#이익공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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