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조선은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이라는 4대 강국의 틈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했다. 오랜 쇄국으로 국제 정세에 문외한이었던 조선은 주일 청나라 공사관 참찬관 황준헌을 만나 자문했다. 이때 황준헌이 김홍집에게 써 준 글이 ‘조선책략’이다.
조선책략의 요지는 “현재 조선을 위협하는 국가는 러시아다. 조선이 생존하려면 중국과 전통적인 사대관계를 유지하고, 일본과 우호를 맺고, 미국을 새로운 우방으로 끌어들이라”는 것이었다. 조선책략에는 중국의 입장이 반영됐고, 이미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중국의 국력을 엄청나게 과장했다. 각론에서도 비판할 내용들이 많다. 하지만 조선에 주는 교훈은 국제사회에서 독자생존이란 불가능하다는 것, 조선은 지금 위기 상황이니,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현실 정세에서 미래의 이익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30년이 지나지 않아 조선은 청, 일본, 러시아의 전쟁터가 되었고, 결국 나라를 잃었다.
이 글이 소개되자 국내에서 엄청난 반발이 일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영남 유생들이 올린 영남 만인소이다. 유림을 자극한 첫 번째 요소는 개방정책이 기독교의 유입을 허락해 유교 국가인 조선의 기틀을 허물 것이란 위기감이었다. 서학이 상공업 육성을 장려한다는 것도 불만이었다. “농업이 산업의 근본이고, 재정이 풍족해지려면 생산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해야 한다. 세상의 물화는 총량이 정해져 있는데, 기술이란 요술을 발휘해 소수가 장악하면 나중에는 임금도 굶주리게 된다”는 것이다.
가장 답답한 부분은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이다. 원수인 일본을 비롯해 낯선 미국과 교류했다가 그들이 우리를 핍박하고 재산을 뺏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어찌 보면 일리가 있는 말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교류를 끊고 우리가 고고하게 독야청청하면 다른 나라가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까?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이런 ‘나 홀로 자강론’이 다시 고개를 든다. 경제가 성장하고 국력이 성장하자 교만해진 것일까. 역사는 세계 최강 대국도 나 홀로 자강은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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