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여름방학 때 7주 정도를 한국에서 보냈다. 문화체험 프로그램으로 방문해 한국어도 배우고 중요한 유적지를 탐방했다.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태권도까지 했다. 일정 없이 한가롭던 날은 여행 안내책자를 들고 하숙집에서 탈출해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풋내기였던 내가 길가에서 만나는 새로운 풍경은 신기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 모든 것이 나의 감성을 끊임없이 자극했던 것 같다. 나의 시각은 꽉 막힌 강변북로 한복판에서 뻥튀기를 판매하는 사람을 구경하는 것으로, 나의 청각은 길가에서 히트곡 모음집 카세트를 판매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디제잉 배틀의 불협화음으로 충격을 받았다. 나의 미각은 익숙지 않은 빨갛고 맵고 또 더 매운 음식에 고생했다.
당시 여행안내 책자에 따르면 한국에 있는 모든 사람은 육감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간첩 때문이었는데 각종 비상 전화번호 중엔 간첩신고도 포함됐다. 그 당시 유행하던 패션인 니트 조끼와 면바지, 그리고 젊은층의 필수품이었던 스포츠 백팩이 거리에 물결을 이뤘던 시기라 아마 간첩이 있었더라도 알아보기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어느 날 판문점 제3땅굴을 방문하고 남북이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는데 그해 9월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남북의 대치를 체감할 수 있었다.
그 뒤로도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며 간첩신고 안내문을 가끔 지하철에서 보기는 했지만 그런 것들이 내 인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최근 그 생각이 바뀌는 계기가 있었다. 지난해 어느 날 시골에서 갑자기 수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목격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칠 뻔했는데 직감적으로 이상한 점이 느껴져 속도를 줄이고 몰래 살펴봤다. 백주대낮에 대놓고 수상한 행동을 하니 오히려 별일 아닌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과 함께 혹시 신고라도 하면 그 사람이 고생할 것 같아 그냥 지나가야 하나 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다시 자세히 살펴본 뒤 수상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국가정보원 간첩신고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리자 긴장이 되어 가슴이 쿵쿵 뛰었다. 한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말을 살짝 더듬으면서 간첩을 신고하고 싶다고 했다. 상대방이 내 얘기를 듣고 담당 부서에 전달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요즘은 콜택시나 응급 자동차 수리 서비스에 전화를 하면 위치 확인이 자동으로 되는 경우도 많던데 내가 위치까지 모든 걸 자세히 설명하고 나니 조금 실망스러웠다. 국가정보원 같은 기관은 자동차 수리 서비스 업체보다 나을 줄 알았다. 신고 후 ‘포상금으로 몇억 원을 받는 건 아닐까?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쓰지?’라는 상상까지 하며 집으로 향했다.
며칠 뒤 한 남성에게 연락이 왔다. 조사 결과를 자세히 알려주진 못하겠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찮아서 신고를 아예 하지 않는다며 신고정신에 대한 감사 표시로 뭔가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택배 하나가 우리 집에 도착했다. 아쉽게도 몇억 원짜리 수표가 아니었던지라 포상금으로 외제차를 사려던 상상은 상자를 뜯자마자 깨졌다. 소포 안에는 국가정보원 로고가 새겨진 탁상시계와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쭉 봐왔던 007영화가 생각나며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정보기관에서 만드는 손목시계가 단순한 손목시계일 리가 없다. 이 작은 시계 안에 청산가리 캡슐 보관통, 암살용 흉기, 스파이 카메라에 레이저까지 장착되어 있는 건 기본이지! 적어도 도청 장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무척 조심스러워 하며 그 시계를 사용했다.
가끔은 수상한 짓을 했던 사람이 진짜로 뭘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내가 신고해서 그 사람한테 문제가 생겼는지도 걱정이 된다. 그래도 그날 그냥 넘어가고 나서 무슨 일이 터졌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영국에서 폭탄테러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나도 주인 없는 가방이 보이면 항상 신고하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교육을 받았다. 한국은 안전한 나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언제나 조심하는 게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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