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현지 시간) 유럽에 진출한 300여 개 한국 기업들은 유럽연합(EU)이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을 법률로 강제하는 데 대해 공식적으로 우려를 나타냈다. 기업들은 이날 EU 집행위원회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글로벌 가치사슬(GVC)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재의 환경에서 모든 납품업체의 규정 준수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EU는 기업들이 전 공급망에 걸쳐 환경, 인권 문제 등을 침해하는 활동들을 확인해 의무적으로 보고하고 개선하는 내용의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 유럽 소재 기업뿐 아니라 유럽 시장에 진출하는 기업들까지 적용 대상에 포함할 예정이어서 국내 기업에도 불똥이 떨어진 것이다. 이 같은 움직임은 과거엔 선택의 문제였던 ESG 경영이 앞으로 기업의 생존을 좌우하는 ‘뉴노멀(New Normal·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 한국도 2025년부터 ESG 공시 의무화
EU에 진출하지 않더라도 ESG 경영은 한국 기업들에 코앞에 닥친 현실이 됐다. 한국 금융당국도 최근 ESG 의무 공시를 단계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2025년부터 자산이 2조 원 넘는 코스피 상장사는 친환경, 사회적 활동을 담은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공시해야 한다. 이러한 공시 의무는 5년 뒤인 2030년부터는 모든 코스피 상장사로 확대 적용된다. ‘기업지배구조 보고서’ 역시 2026년부터 모든 코스피 상장사가 공시 의무를 갖게 된다.
금융위원회는 “ESG 등 비재무적 요소를 감안한 책임 투자가 확대되고 있지만 기업의 관련 정보 공개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고 제도 도입 배경을 설명했다. 국내에선 현재 매년 100곳이 넘는 기업들이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내고 있지만 이를 공시하는 곳은 20개에 불과한 실정이다.
ESG 경영에 대한 의무 공시는 전 세계적인 추세다. 영국은 2025년까지 모든 상장사의 ESG 정보 공시를 의무화했다. 올해 3월부터 유럽에서 활동하는 모든 금융사는 ‘지속가능 금융공시 제도(SFDR)’를 적용받는다. 홍콩, 일본도 ESG 의무 공시 도입 계획을 발표했다. ESG 자율 공시를 시행하고 있는 미국에서도 ESG 공시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최근 국내 증권사에는 국내외 ESG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컨설팅을 요청하는 기업들이 크게 늘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특히 해외 기업들과 경쟁해 계약을 따내야 하는 경우 ESG 지표가 중요한 평가 요소가 됐다”며 “ESG가 기업 매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실질적인 고민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에 맞춰 국내 기업들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금융권에선 우리금융그룹이 이사회 내에 ESG 경영 전반에 대한 최고 의사결정기구 역할을 하는 ‘ESG경영위원회’를 신설하기로 했다. 카카오도 지난달 ‘ESG위원회’를 새로 만들고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 위원장을 맡았다. 전통 제조업인 시멘트회사 쌍용양회는 이미 지난해 12월 업계 최초로 ESG 경영을 선포하고 ESG 전담조직을 만들었다. NH농협은행은 2040년까지 회사에서 사용하는 모든 전력을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도 제시했다.
배한주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정부도 탄소중립 추진 전략 등 ESG 관련 정책을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발표했다”며 “ESG가 뉴노멀이 된 만큼 기업과 투자자들의 ESG 활동은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2030년 전 세계 ESG 투자 130조 달러”
ESG 경영이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 잡을 움직임을 보이면서 글로벌 자본시장에서는 ‘ESG 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동안 ESG 투자가 선언적인 의미에 그쳤다면 지금은 세계 각국 정부와 기업은 물론이고 연기금, 금융회사, 개인투자자 등이 앞다퉈 ESG 투자에 뛰어들고 있는 양상이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1∼6월) 기준 전 세계 ESG 투자 자산 규모는 40조5000억 달러(약 4경5000조 원)로 1년 반 만에 32% 증가했다. 지난해 전 세계에서 새롭게 선보인 상장지수펀드(ETF)의 15%가 ESG 펀드였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2028년까지 전 세계 ESG 펀드 규모가 20조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내다봤다. 국내에선 올 1월 ESG 회사채 발행 규모가 1조1000억 원으로 이미 지난해 연간 발행 규모(8000억 원)를 넘어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촉발된 지속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글로벌 자본시장의 ESG 투자 열기로 이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윤석모 삼성증권 ESG연구소장은 “코로나19 사태로 환경, 기후변화 등에 대한 의식이 많이 높아졌고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를 계기로 ESG 투자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코로나19 위기 대응 과정에서 역할이 커진 세계 각국 정부가 ESG 분야에 직간접적으로 자금을 투입하고, 그 자금이 실물 경제로 흘러 들어오면서 ESG 투자가 빠른 속도로 커진 것으로 풀이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ESG 자산에 유입된 자금은 17조 달러에 이른다. 도이체방크 등에 따르면 2030년 전 세계 ESG 투자는 130조 달러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같은 움직임에 비해 국내 ESG 투자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펀드평가사 KG제로인에 따르면 지난달 말 현재 국내 ESG 펀드의 운용 순자산은 2조3187억 원으로 국내 주식형 펀드(액티브 기준·20조9403억 원)의 11%에 불과하다. 펀드 수도 60개로 2019년 12월 말(50개)보다 10개 늘어났다.
다만 ESG 투자 수익률이 높아지면서 앞으로 국내에서도 ESG 투자 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게 금융업계의 전망이다. 지난해 국내 ESG 펀드의 평균 수익률은 연 32.85%로 1년 전(11.60%)의 3배 가까이로 뛰었다. 올해 1월 수익률도 7.30%로 코스피 상승률(3.58%)을 웃돌았다. 1월 한 달간 ESG 펀드에 유입된 자금도 3369억 원이었다. 국내 주식형 펀드에서 1조 원 넘게 자금이 빠져나간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ESG 펀드를 포함하는 사회책임투자(SRI) 펀드 설정액은 지난달 말 1조4612억 원으로 2019년 말보다 360% 증가했다.
○ “ESG, 아직 가보지 않은 길”
국내에선 ‘큰손’ 기관투자가들이 ESG 투자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국민연금은 2022년까지 ESG 가치 반영 자산을 전체 자산의 50%(약 500조 원)까지 늘릴 계획이다. 한국투자공사도 국내 최초로 도입한 ‘글로벌 ESG 전략 펀드’ 규모를 현재(4억 달러)의 두 배로 확대할 예정이다.
하지만 ESG 경영 및 투자 확대가 실제 어떠한 성과로 이어질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는 지적이 많다. ‘가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이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투자자 입장에서 보면 ESG 평가가 높다고 해서 해당 기업의 주가가 오르는 건 아니다”라며 “이제 실험을 하는 단계이고 연기금 등 공적 기관들도 ‘새로운 룰’을 만들고 있는 만큼 지금까지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내다봤다.
ESG 공시 의무 등으로 기업들의 부담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 대략 1억 원이 드는 보고서 발간 비용, ESG 관련 데이터를 모으기 위한 인적 자원 투입 등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기업들에 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윤진수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사업본부장은 “금융당국이 발표한 ESG 정보 공개 가이던스의 구체성이 떨어지는 점도 문제”라며 “ESG 공시 활용도를 높이고 기업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구체적인 공시 기준을 빨리 마련해 기업들에 안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SG 투자에 나설 때는 ‘그린 워싱(Green Washing·위장 환경주의)’에 주의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송재경 흥국증권 리서치센터장은 “기업들이 ESG 경영 비전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한 다음 이를 실제 경영 수치로 제시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ESG 투자를 단순한 테마주 투자로 봐선 안 되고, 경영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으로 이해하고 투자의 문법을 바꿔 기후변화 등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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