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겨울에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 내리고 나면 레돔은 늘 밭으로 갔다. 눈 내린 밭에 무슨 할 일이 있다고? 밭의 어느 쪽 눈이 가장 먼저 녹는지, 어느 쪽이 가장 오래 남아있는지 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2월이 되면서 언 땅이 녹자 그는 겨울 내내 틈만 나면 했던 막대기 타령을 시작했다. 포도나무 줄기들이 타고 오를 줄을 묶어 지탱하게 할 막대기라고 했다. 삽목 묘목으로 심었던 나무들이 제법 올라와서 올해는 가지를 펼칠 줄을 묶어줄 지탱목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길이가 3m 정도 되고 두께는 한 20cm 정도면 좋겠어. 잘 썩지 않는 아카시아 나무 재질이 있을까? 300개 정도는 필요해.” 늘 같은 문제지만 나는 이런 것들을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가장 먼저 충북 충주시 철물점이나 농기계, 농자재 등등을 다녀보지만 없다. 쇠막대기는 많지만 나무 막대기는 구하기가 쉽지 않다. 요즘은 모두가 쇠막대기를 쓴다고 하는데 그는 기어코 나무 막대기를 찾아내라고 한다. 레돔과 일하면서 깨달은 것은 그가 세상에 없는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찾아 헤매면 분명 어딘가에는 있다. 결국 이 나무 막대기는 강원 원주시의 어느 농자재점에서 찾아냈다. 지주목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이름을 알았더라면 찾아내기가 좀 더 쉬웠을 것이다.
“도끼와 기름, 가스불이 필요해.”
지주목을 싣고 오자 그의 ‘필요해’ 대잔치가 시작되었다. 도끼로 지주목의 끝부분을 뾰족하게 한 뒤 나무가 썩지 않도록 칠할 기름이 필요하다고 했다. 기름은 지난번 농사에 쓰려고 만들어둔 자담 오일을 꺼내다 주었다. 그는 창고에서 꺼낸 녹슨 도끼로 나무의 끝부분을 쳐내기 시작했다. 좋은 냄새가 났다. 그렇지만 300개를 언제 다 하냐. 하루 일꾼이라도 부르자고 하니 혼자서 다 할 수 있단다. 뚝딱거리는 소리를 듣고 이웃집 아저씨가 와서 보고는 숫돌을 들고 와 도끼를 갈아준다. 일이 훨씬 빠르다. 레돔은 뭐든지 열심히 하지만 일머리는 없다.
나무에 기름칠을 하고 나자 이제는 뾰족하게 만든 부분은 불로 그을려야 했다. 그래야 땅에 박혀도 쉽게 썩지 않는단다. 가스불로 지주목의 끝을 그을리니 모양이 거인의 연필 같아졌다. 진짜 거인이 나타나 300개의 연필을 포도밭 언덕에 꼭꼭 박아주면 좋겠다.
두어 시간 걸려서 여섯 개의 지주목을 완성하고 나자 이제는 철사 줄이 필요하다고 한다. 철사 줄은 철물점에 가면 쉽게 구할 수 있겠지, 했는데 원하는 것이 없다. 철사 줄 두께가 2.2mm여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충주 철물점을 다 뒤져도 2mm 혹은 2.6mm밖에 없다. 너무 가늘거나 너무 두껍다. 경북 김천시에서 포도밭 하는 친구에게 물으니 그쪽엔 많단다. 철사 줄 사러 김천까지 가야 하나, 하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2.2mm가 있다. 녹슬지 않는 포도나무 유인 줄이라고 딱 나와 있다. 이름이 ‘포도나무 유인 줄’이었다. 이름을 알면 사는 것이 열두 배쯤 편해진다.
기름칠 하고 끝을 그을린 지주목과 유인 줄을 들고 포도밭으로 가니, 벌써 봄이다. 복숭아밭에서 농부들이 가지치기를 하고 냉이를 캐러 나온 할머니도 있다. 지주목을 땅에 박으니 쉽게 들어간다. 언 땅이 모두 녹았다. 바람은 쌀쌀한데 햇살은 이미 봄이다. 막대기 치는 소리를 듣고 겨울 냉이 캐던 할머니가 오셔서 우리가 하는 일을 보더니 이렇게 한마디 하신다. “정월달이 젤 무서워. 모든 게 녹은 것처럼 따뜻하지만 언제 변심해서 다 얼어버리게 할지 모른다.” 할머니는 아직은 땅에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신다.
할머니의 설명에 레돔이 나를 가리키며 ‘2월 같은 여자’라고 한다. 짜리몽땅하다는 뜻인가, 했더니 언제 변할지 변덕스럽고 차갑지만 잘 보면 그 안에 따뜻한 봄기운이 한가득 들어있단다. 어머나, 이 남자 정말 낭만적이네! 그렇지만 별로 좋게 들리지도 않는다. 얼마나 일을 시켜 먹으려고 저러나 싶다. 깊게 숨을 쉬어 정월달 공기를 마셔 본다. 이미 봄기운이 가득하다. 농부의 시간, 이제 시작이다.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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