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은 그제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이명박(MB) 정부 당시 국정원이 국회의원 등 각계 인사 1000여 명의 동향을 파악한 문건의 존재를 확인했다. 박지원 국정원장은 “직무범위를 이탈한 불법 정보”라며 정보위 의결이 있으면 비공개로 문건 보고를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당시 문건 공개를 요구하는 특별결의안을 발의했고, 국민의힘은 국정원 설립 이후 불법사찰 전반을 살펴보자는 특별법 제정을 주장했다.
국정원의 사찰 의혹은 역대 정보기관의 어두운 그늘이었다. 현 정부 들어 국정원의 국내파트 정보 수집이 법적으로 금지됐지만 그 이전까지 국정원은 정치인과 유력 인사들의 동향 정보를 관행적으로 수집했었다.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는 MB 정부 국정원의 사찰 사실을 2017년 공식 확인했다. 이어 지난달까지는 사찰 대상이 된 개인들과 시민단체 차원에서 정보공개 청구소송을 진행해 왔다.
국정원이 주요 인사들을 상대로 ‘직무범위를 이탈해서 불법적으로’ 사찰을 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냥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조직적인 부정과 탈법에 눈감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당이 4·7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50여 일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 갑자기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이슈화하고 나선 것은 선거용이라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어제 여당 의원들이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일제히 이슈 키우기에 나선 점만 보더라도 그렇다. 국회 정보위 민주당 간사인 김병기 의원은 TBS 라디오에서 “이명박 정부 불법사찰이 박근혜 정부에서도 이어졌을 개연성이 있다”고 말했다. 같은 당 김민석 의원과 강훈식 의원도 각각 다른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비슷한 공세를 폈다. 이에 맞서 야당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도 국정원 불법사찰이 있었다고 맞불을 놓았다.
국정원은 그제 정보위 보고에서 “문건엔 적법, 불법의 국가기밀과 개인정보가 모두 담겨 있다”고 밝혔다. 문건 내용의 탈법 여부를 가려서 분류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이고, 현 시점에서의 공방이 실체적 진실 규명보다는 정치 공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구나 여당이 아무리 의도가 순수하다고 주장해도 문제를 제기한 시점이 적절치 않으면 선거 개입 논란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여야가 진정으로 국정원의 어두운 과거사를 정리하겠다면 사찰 규명은 보궐선거 이후로 미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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