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방송인 서장훈은 농구보다 야구를 먼저 시작했다.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에 빠져들어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 선수가 됐다. “강한 어깨는 아니었지만 방망이는 자신 있었다”는 게 그의 회고다. 동갑내기 포수인 이도형(현 두산 타격코치)과 배터리를 이루거나 1루수, 중견수를 맡았다. 6학년 때 제1회 OB베어스기 초등학교 야구대회 우승 멤버다.
‘불사조’ 박철순을 좋아했던 그의 야구 인생은 오래가지 않았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적응이 쉽지 않았다. 당초 같이 가려던 초등학교 친구 2명이 사정으로 못 가면서 외로움이 컸다. 낯선 환경에 기합, 폭언이 흔한 시절이었다.
몇 달 만에 친구가 많던 동네 중학교 야구부로 전학 갔다. 이번에는 운동선수가 다른 학교로 옮기면 일정 기간 뛸 수 없는 이적 제한 규정에 묶였다. 특정 학교의 유망주 싹쓸이 등을 막을 목적. 요즘은 악법으로 분류돼 없어졌다.
야구공을 놓은 사이 같은 학교 농구부 입단 권유에 전업했다. 이듬해 현주엽이 1년 후배로 들어왔고, 서장훈의 키는 2m를 돌파했다. 또래에 비해 농구공을 늦게 잡았지만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이승엽은 부모의 반대에 맞서 어렵게 입문한 야구를 중학교에 들어간 뒤 관두려 했다. “구타가 심했다. ‘줄빠따’에 대비해 속옷 안에 마른 오징어를 넣고 가는 걸 봤다.” 이승엽의 아버지가 언론에 밝힌 내용이다. 그래도 하려는 의지가 워낙 강해 포기하지 않았다. 푸른 멍에 바셀린을 발라주던 어머니 정성은 그의 눈물까지 닦았다.
중학교를 다닌 지 30년도 넘은 서장훈과 이승엽도 학교폭력(학폭)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도 속 시원한 해법을 찾기는 힘들었다. 전학이나 인내가 그나마 최선. 강산이 여러 번 바뀔 세월이 흘렀어도 학생 운동선수의 고민은 여전히 심각하다. 최근 여자 프로배구 인기스타 이재영 다영 쌍둥이 자매로 촉발된 학폭 사태가 스포츠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어떤 지도자는 진학을 미끼로 선수나 학부모에게 폭력뿐 아니라 열악한 처우를 핑계 삼아 금품 수수 등 악행을 저지른다. 팀 성적에 동료들 진로까지 좌지우지되기에 안하무인 횡포를 부려도 무사통과되는 일그러진 영웅들도 많다. 일벌백계를 강조하지만 제 식구 감싸듯 슬며시 징계가 풀려 어느새 현장에 복귀한다. 피해자와 가해자만 부각될 뿐 진짜 책임을 져야 할 어른들의 존재는 찾기 힘들다. 반면 불의에 저항하다가 괘씸죄에 걸리면 왕따가 되거나 아예 보복성 퇴출을 당하기도 한다.
물론 원 스트라이크 아웃, 지도자 자격 강화, 피해 신고 및 관리 시스템 정비, 특기자 평가 방식 변화 등 숱한 관련 대책이 쏟아지면서 일부분 개선된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갈 길이 멀다. 악순환을 끊으려면 일회성 땜질 처방이나 반짝 관심 갖고는 안 된다. 학폭 피해는 수십 년이 지났어도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화석처럼 또렷이 남아있다.
학폭은 철없는 시절에 저지를 수 있는 실수가 아니며 잘못된 행동에는 반드시 책임이 뒤따른다는 인식의 전환이 절실하다. 지속적인 인성 교육과 함께 꼭 운동이 아니더라도 다른 진로를 찾게 하는 맞춤형 직업교육도 중요하다. 꿈과 희망에 목마른 10대에게 다양한 여정을 제공해야 한다. 청소년기 ‘오로지 이 길뿐’이라는 절박한 생각에 올인하는 건 불행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요즘 학창 시절 앨범이 시간을 거슬러 학폭의 증거물로 소환되고 있다. 앨범의 어원은 흰색을 뜻하는 라틴어 ‘Albus’. 기록을 새기는 ‘화이트보드’라는 의미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야 될 공간이 더 이상 끔찍한 흑역사의 한 페이지가 돼선 안 될 일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