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플 소비학[횡설수설/김선미]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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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기업이 최근 스웨덴의 신제품 향수를 수입해 들여오며 온라인을 통해 래플 판매를 공지했다. 래플(raffle)은 추첨 복권이라는 뜻으로, 한정 수량의 제품을 살 수 있는 자격을 무작위 추첨으로 주는 방식을 일컫는다. 나이키와 협업해 운동화를 내놓았던 미국의 유명 힙합 가수가 ‘우주의 향기를 만들어냈다’는 업체의 마케팅에 래플의 경쟁률은 500 대 1에 달했다. 100mL에 30만 원이 넘는 향수였다.

▷래플은 MZ세대(1980년 이후 출생)와 코로나19가 만나 시너지를 일으킨 소비 행태다. 2015년 무렵부터 럭셔리 브랜드와 스트리트 브랜드가 한정판을 내놓기 시작할 때엔 선착순 판매 방식이었다. 글로벌 패션 브랜드 H&M이 프랑스 발맹과 협업했을 때에는 서울 명동에서 엿새간 노숙 구매 행렬이 이어졌다. 미국 슈프림이 한정판을 낼 때마다 뉴욕과 파리에서도 비슷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코로나로 외출이 어려워지자 MZ세대는 쇼핑의 공간을 비대면 채널로 옮겨왔다. 업계는 ‘공정’을 목숨만큼 중시하는 이들을 위해 래플을 제시했다.

▷래플은 리셀(resell)로 불리는 되팔기와 한 짝이다. 한정판 제품은 공급은 적은데 수요가 많기 때문에 중고여도 시간이 지나도 가격이 오른다. 특히 MZ세대가 매달리는 건 한정판 운동화다. 부동산과 예술품에 비하면 진입장벽이 높지 않은 데다 신고 즐기다가 현금화할 수 있어 대체자산의 성격을 띤다. 이 때문에 경매회사들까지 뛰어들며 달아오른 글로벌 운동화 재판매 시장은 2025년엔 60억 달러(약 6조8000억 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주말 서울 여의도에 개점한 한 백화점에는 유명 중고거래 플랫폼의 첫 오프라인 매장이 선보였다. 럭셔리 브랜드 또는 유명 연예인과 협업한 운동화들을 판다. 한정판이라 구하기 어려웠던 수백만 원짜리 제품들도 있다. 럭셔리 제품에 기꺼이 지갑을 여는 MZ세대와 그들의 부모 세대인 과거 X세대가 두루 방문한다. 이 중에는 운동화 가격 추이를 주식 차트처럼 분석하는 스니커테크(스니커즈+재테크) 고객도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운동화 재판매도 주식처럼 투자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국내 래플 시장의 성장에는 국산 온라인 패션 플랫폼이 큰 역할을 했다. 펭수 한정판 상의도, 코로나 방역 마스크도 래플을 했다. 언택트 소비자들에게 제품 스펙에 대해 상세하게 알리고, 소비를 게임하듯 즐기는 재미를 일깨우고, 공정한 소비의 규칙을 제시했더니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매출이 폭풍 신장 중이다. 결국은 공정과 신뢰의 문제다. MZ세대가 원하는 것을 알고 싶다면 래플을 연구하면 된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래플#소비학#추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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