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을 이은 교훈, 백제 무령왕릉 발굴의 비밀[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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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비 비단 관의 좌우 장식(위 사진)과 귀걸이의 표면에 자그마한 금 알갱이가 촘촘히 장식되어 왕이 착용한 실용품임을 짐작하게 하는 무령왕 금귀걸이(가운데 사진), 왕릉 널길 입구에서 발견된 무령왕릉 지석.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무령왕비 비단 관의 좌우 장식(위 사진)과 귀걸이의 표면에 자그마한 금 알갱이가 촘촘히 장식되어 왕이 착용한 실용품임을 짐작하게 하는 무령왕 금귀걸이(가운데 사진), 왕릉 널길 입구에서 발견된 무령왕릉 지석.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1971년 7월 8일은 한국 고고학 발굴사에서 가장 중요한 날로 손꼽힌다. 이날 백제 25대 무령왕의 능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나라 역대 왕릉 가운데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채 발굴되었으며, 주인공의 신원을 특정할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기에 큰 관심을 끌었다. 올해는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다. 학자들은 “백제사 연구가 무령왕릉 발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할 정도로 이 발굴은 획기적이었다. 왕릉 발굴 후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무엇이고 또 지난 반세기 동안 밝혀낸 것은 무엇일까.

○ 백제사 수수께끼 풀어준 지석

왕릉 발굴 이전까지 무령왕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삼국사기’ 등 역사서에는 그가 농사를 장려하고 민심을 안정시켰으며 강역을 넓혀 백제를 다시금 강국의 반열에 올렸다는 짧은 기록만 남아 있고, 언제 태어나 몇 세에 세상을 떴는지조차 쓰여 있지 않다. 이런 아쉬움을 왕릉 발굴이 일부 해소했다. 고분 입구에서 무덤 방까지의 통로인 ‘널길’에서 발굴된 네모난 돌판 2장, 즉 지석에는 무령왕 부부의 삶과 죽음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조금만 더 자세히 써주지’라는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하나 그 짧은 기록 덕분에 그간 몰랐던, 혹은 잘못 알았던 사실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지석에는 백제 사마왕(斯麻王·무령왕의 생전 이름)이 62세 되던 523년 5월 7일 세상을 떴고 27개월 후인 525년 8월 12일 능에 안장됐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 기록을 통해 무령왕이 선왕인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음이 밝혀졌고, 그를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기록한 ‘삼국사기’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었다. 또한 백제 왕실에는 왕이 세상을 뜨면 시신을 관에 안치하고 27개월 동안 의례를 거행한 뒤 왕릉에 매장하는 특이한 장례풍습이 있었음을 알려주었다. 아마도 이 기간에 태자가 선왕의 장례를 주도하면서 정치적 위상을 다지고 왕위를 계승하였을 것이다.

○ 백제문화 퍼즐 맞추기

1992년 8월,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사로 근무할 무렵에 박물관 관람시간이 끝나길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삼국시대 귀금속공예품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저녁이면 전시실을 찾아 금관식, 금귀걸이, 금동신발, 금은으로 장식된 칼 등을 세밀히 살펴보느라 밤새는 줄도 몰랐다.

문득 왕의 귀걸이(국보 156호) 무게가 궁금해졌다. 묵직한 줄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수치를 확인해볼 참이었다. 잔뜩 긴장하며 귀걸이를 저울에 올려놓는 순간 눈금이 90g을 향했다. 어림잡아 계산하니 당시 통용되던 무게 단위로 23돈이 넘어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 금귀걸이 가운데 가장 무거운 사례에 해당한다. 신라 금귀걸이 가운데 백미로 손꼽히는 경주 보문동 합장분 출토품(국보 90호)의 무게가 58.7g이니 무령왕 귀걸이에는 미치지 못한다. 귀걸이의 무게는 금의 양과 관련되므로 소유자의 신분과 관련이 있다. 백제 금귀걸이 대부분이 10g 내외임을 감안하면 무령왕 귀걸이는 특별하다. 간혹 전시실에서 ‘왕의 귀걸이라 역시 다르네!’라는 탄성이 들리기도 한다.

몇 년 후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서 유물을 정리할 때 한쪽에 무더기로 쌓인 상자를 보니 나무뿌리, 왕겨 등 유기물이 가득했고 중간에 유리구슬, 금구슬이 섞여 있었다. 곧바로 미정리된 무령왕릉 수습품임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 주목한 것은 왕겨였다. 무령왕릉의 밀폐상태가 워낙 좋았기에 ‘왕릉에 벼를 공헌했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곧 잘못된 생각임을 알게 되었다. 무덤 바닥에서 수습한 유물을 쌀 포대에 담는 발굴과정에 섞여 들어간 것이었다. 이런 시행착오로 유물을 제대로 조사하는데 십여 년 걸렸고 국립공주박물관은 그 자료를 정리해 특별전을 열었다.

무령왕릉이 무질서 속에서 하룻밤 만에 ‘뚝딱’ 발굴된 점은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최악의 발굴’에 대한 반성이 한국 고고학계의 발굴 수준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는 점이다. 1973년 천마총 발굴 현장에서 철저한 준비와 정밀한 발굴로 나아가는 첫발을 뗄 수 있었다.

○ 앞으로의 50년을 기대하며

1990년대 후반 무령왕릉 보존을 둘러싸고 큰 논란이 벌어졌다. 왕릉 건축부재인 전돌이 봉분 무게를 견디지 못해 다수 부서졌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 왕릉 발굴 이후 문제가 생겼음이 드러났다. 이 왕릉은 벽돌무덤이기 때문에 원래 봉분이 크지 않았으나 1970년대에 이 무덤의 봉분을 ‘왕릉에 걸맞은 규모’로 거대하게 복원했던 것이다.

1400년 이상 잘 보존되어온 백제 왕릉을 20세기 한국에서 30년도 채 안 되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뜨린 것이다. 결국 문화재청은 봉분 높이를 줄이고 왕릉을 영구적으로 폐쇄했다. 문화재 보존기술이 나날이 발전하니 세계문화유산인 무령왕릉이 장차 원상을 회복해 새롭게 공개될 날이 올 것으로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근래 학계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분야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바로 백제 왕실의 상장례 관련 연구다. 왕릉에 인접한 정지산 유적이 백제왕실의 빈례와 관련한 시설인지, 백제의 상장례가 주변국과는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국립공주박물관은 왕릉 발굴 성과를 충실히 담은 ‘무령왕릉 재보고서’ 완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앞으로 다시 5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또 어떤 비밀이 새롭게 밝혀질지 몹시 궁금하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백제#무령왕릉 발굴#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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