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딸아이 둘을 데리고 이 땅에 와서 엄청난 고생 끝에 겨우 살 만하니 이런 뚱딴지같은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미국 뉴욕에 무섭게 퍼지던 지난해 5월. 70대 한인 동포 A 씨가 뉴욕에서 특파원으로 일하던 필자에게 e메일을 보내왔다. 그는 “2개월 정도 집에서 꼼짝 못 하고 그냥 있다. 설사를 계속하며 걷기도 힘들다. (한인 의사들이 마련한) 항체검사라도 받고 싶다”며 도움을 청했다. A 씨는 30대 초반 미국에 왔다. 마흔 줄에 들어선 딸이 둘이나 있지만 생각이 너무 달라 평소 대화를 많이 하지 않는다고 푸념했다.
증상이 있어도 코로나19 진단조차 받기 어렵던 뉴욕에서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안타까웠다. 그저 동포 의사들이 운영하는 코로나19 상담 전화번호와 조태열 전 주유엔 대사가 부친 조지훈 시인의 시 중 가장 가슴에 와닿는다고 했던 ‘병(病)에게’를 적어 답장을 보낸 게 전부였다. 다행히 A 씨는 지난해 10월 “응급실에서 3번 검사를 받았는데 모두 음성이 나왔다”고 반가운 메일을 보내왔다.
A 씨와 같은 이민 1세대들 중 ‘아메리칸 드림’을 일군 이들이 꽤 있지만, 일부는 힘든 이민 생활 중 가족이 흩어져 쓸쓸한 노년을 보낸다. 코로나19 확진을 받고 병원 응급실에서 숨진 B 씨도 그랬다. 시신을 인수할 가족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뉴욕주의 무연고 묘지에 묻혔다. 코로나19 위기는 특히 저소득층 한인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뉴욕한인회가 지난해 기금을 모아 어려운 한인들에게 먹을거리를 나눠줬는데, 금세 동이 났다. 한인회 관계자는 “‘한인회가 나눠준 식품 쿠폰으로 남편 제사상을 어렵게 차렸다’는 감사 인사를 받고 울컥했다”고 했다.
코로나19 위기 이후 아시아계에 대한 차별과 위협도 늘고 있다. 지난해 5월 말 뉴욕시에서 대규모 약탈 피해가 일어났을 때 한인 가게들도 피해를 입었다. 소호지역에서 옷가게를 하는 한인 2세 조너선 최 씨(25)는 “글로벌 브랜드 매장은 피해를 감수할 수 있겠지만 우린 밤을 새워서 가게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어려운 한인 동포들의 사연은 지금도 메일함에 날아든다. 어린 딸을 데리고 이민을 온 C 씨는 “20대 딸이 4년 전 재생불량성빈혈로 골수 이식을 받았는데 이제 혈액암으로 고생하고 있다. 돈이 되는 건 뭐든지 팔아서 버티고 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며 도움을 호소했다. 이민 1세대 비중이 줄고 있는 미 한인 사회에서는 일본계처럼 ‘민족성 소멸’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걱정도 크다.
다행인 점은 우리말은 서툴러도 한국인의 문화와 자부심을 잊지 않고 있는 2, 3세가 많다는 점이다. K팝, 한국 화장품 등을 미국에 유통하는 사업가나 할머니에게 배운 한국 음식을 뉴욕에 소개하는 젊은 한인들이다. 한인 이민 가정의 가족애를 다룬 영화 ‘미나리’로 올해 미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리 아이작 정 감독(43)처럼 강인한 생명력으로 미국에 뿌리내린 우리들의 ‘미나리들’이다.
한국은 그들을 잊고 살지 몰라도 그들은 그렇지 않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2019년 3월 1일(현지 시간) 정오 미 뉴욕 맨해튼 유엔본부 주변 광장에서 동포 40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운동을 재연했다. 뉴욕 한복판에서 큰 소리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눈물을 글썽거리던 동포들이 기억난다. 미국 땅에 홀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며 고국을 잊지 않고 있는 미나리들에게 우린 알게 모르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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