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지하철 역사에서 작별하는 모녀를 보았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키가 작은 두 사람은 마치 한 사람처럼 포개어져 있었다. 포옹하는 둘에게는 시간도 포개진 듯 느리게 흘렀다. 이윽고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두 사람. 먼저 돌아선 쪽은 딸이었다. 안 그러면 엄마는 떠나지 않을 테니까.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오래 손을 흔든다.
왕복 여덟 시간 거리에 떨어져 사는 엄마와는 일 년에 너덧 번쯤 만났다. 헤아려보면 365일 중 겨우 열흘 남짓한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었는데, 그 짧은 시간을 실감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너무 익숙해서 무심했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혼자 사는 엄마를 오래 만나지 못하게 되자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선명해졌다.
직계가족 모임이 가능해지고 엄마를 만나러 갔다. 그 사이 계절이 바뀌었다. 손주들은 키가 자랐고 엄마는 나이 들었다. 모처럼 시끌벅적한 이틀을 보내고 헤어지는 시간, 엄마는 언제나처럼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인사와 포옹을 더디게 나누고는 차에 올라탔다. 잘 가라며 손을 흔드는 엄마. 나는 창문을 내리고 엄마의 모습을 찍었다. 전에는 부끄럽다며 손사래를 치던 엄마가 말했다. “우리 언제 또 만나려나. 찍은 사진들 다 보내주렴. 조심히 가.” 자동차가 출발하고 여러 번 돌아보아도 엄마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미국의 사진작가 디애나 다이크먼은 27년 동안 부모님이 배웅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헤어지는 순간마다 자동차 창문을 내리고 부모님을 찍었다. 손을 흔들며 어깨동무를 하거나 어린 손주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부모님. 사진 속 부모님은 해마다 늙어갔고, 언제부턴가 엄마만 남았다. 주름이 깊고 앙상해진 엄마는 홀로 딸을 배웅했다. 건강이 쇠약해지자 링거를 맞으며 두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사진에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집뿐이었다. 다이크먼의 사진을 본 후로 나는 배웅하는 엄마를 찍기 시작했다.
언제 또 만나려나. 엄마의 말에 언제 또 헤어지려나 작별을 생각하게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 만남보다 헤어짐에 마음이 기울게 된 건 시간의 흐름을 선명히 깨닫고부터였다. 사는 동안에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과 몇 번이나 만나고 헤어질까. 애틋하고 고마웠던 헤어짐을 몇 번이나 기억하게 될까. 나는 알고 있다. 남아 있을 엄마와의 작별을 세어본다면 세어볼 수도 있을 거라는 걸. 그러려다 그만두었다. 그 대신에 엄마가 손 흔드는 사진을 가만히 보면서 그려보는 것이다. 엄마에게 마주 손 흔들던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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