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항상 제한적이고 조건적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한국계 미국인 리 아이작 정 감독이 ‘미나리’에서 재현하는 사랑이 그러하다. 장르적으로 보면 아주 평범한 영화다. 이민자들의 나라인 미국에서는 차고 넘치는 게 이민 서사다. 이 영화를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낯설고 물설고 말도 선 곳에서 살아가는 할머니의 존재다.
이와 관련하여 놓치기 쉽지만 아주 핵심적인 장면이 있다. 어느 날 잠자리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 죽기 싫어요.” 할머니는 자신과 방을 같이 쓰는 어린 손자의 말에 기겁한다. 손자는 기도를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어머니의 말에 따라 잠자리 기도를 마쳤다. 그런데 야뇨증이 있는 데다 심장이 좋지 않아 언젠가 수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죽는 게 겁났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그 말을 듣고 아이를 자기 옆으로 오게 해서 안아준다. “괜찮아. 할머니가 너 죽게 안 놔둬.” 할머니는 손자를 안심시키고 재운다.
그런데 아침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야뇨증이 있는 손자가 아니라 할머니가 침대에 오줌을 지린 거다. 알고 보니 뇌졸중이다. 손자의 야뇨증이 사라지고 할머니의 뇌졸중이 시작된 것은 순전히 우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식의 투영일 수 있다. 손자의 병을 떠맡고자 하는 무의식. 이렇듯 사랑은 의식만이 아니라 무의식에서조차 자신을 내어주려는 마음인지 모른다. 손자가 나중에 심장 수술을 안 해도 된다는 진단을 받을 만큼 건강해진 것도 그러한 사랑의 힘이다. 잘 생각해 보면 이민 생활에 지친 딸 내외가 갈라서지 않는 것도 결국 그 사랑 덕이다.
자식들을 위해 무의식에서조차 자신을 내어놓는 어머니, 아니 할머니가 우리 역사에는 유독 많았다. ‘미나리’는 그분들에 대한 헌사요 애도다. 감독은 할머니가 서사의 중심이 아님에도, 우리 역사에서 한 번도 중심인 적이 없던 할머니를 서사의 중심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마술을 부렸다. 이 영화가 따뜻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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