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만난 외교안보 분야 고위 당국자의 말이다. 꽉 막힌 남북, 북-미 대화의 해법을 묻자 그는 대뜸 올림픽을 화두로 꺼냈다.
교착 상태에 빠진 대화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 전 세계가 참여하는 올림픽을 외교 이벤트로 활용하려는 정부의 구상은 알고 있었지만 ‘개최 여부도 불투명한 도쿄 올림픽이라니’. 그의 답변에 맥이 살짝 빠졌다. “북한이 참여할까요?” 그에게 물었다. 예상치 못했던 답변이 돌아왔다. “베이징 올림픽도 있잖아요.”
문재인 대통령 임기 내에 어떻게든 북-미 비핵화 대화의 물꼬를 트겠다는 정부의 강박에 가까운 의지는 알고 있지만 ‘내년 2월 베이징 올림픽이라니.’ 설마 했다.
얼마 후 또 다른 고위 당국자를 만났다. 설마가 아니었다. 평소 입이 무거운 그도 베이징 겨울올림픽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다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2022년 베이징 겨울올림픽 때 열차로 베이징을 가는 계획이 있었다. 북한 내 철로 복구가 우선 필요한데, 유엔의 대북 제재가 풀리지 않아 그건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올림픽 릴레이 대화의 의미를 강조했다. 도쿄가 어렵다면 베이징 올림픽에서 북-미가 비핵화 협상 테이블에 다시 마주 앉을 수 있도록 중재하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불씨를 되살리고…. 청와대와 정부 고위 당국자들의 시선은 이미 도쿄를 넘어 베이징을 향하고 있다.
2018년 2월 평창 겨울올림픽. 한반도기를 앞세운 남북 선수단 공동 입장,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게다가 김여정과 문재인 대통령의 만남, 그리고 이어진 4월 남북 정상의 도보다리 산책, 5월 2차 판문점 정상회담, 9월 3차 평양 정상회담까지. 숨 가쁘게 진행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긴박한 순간과 이벤트들. 문 대통령은 ‘어게인(again) 2018’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자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코로나19 극복의 장으로 연출하고, 미국 못지않은 영향력을 세계에 과시하려는 중국 역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설 것이다. 북한을 압박할 가능성도 있다. 놓칠 수 없는 기회다.
그렇지만 베이징 올림픽은 2022년 2월 4∼20일 열린다. 3월 9일 차기 대선을 한 달 앞둔 시점이다. 합리성, 평화에 대한 당위성보다는 감정에 편승한 진영 간 증오와 대립이 극에 달할 시기다. 정부의 의도와 관계없이 남북 대화 이벤트가 정치적 논란을 피해갈 여지는 없다.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는 이벤트를 앞세운 대화를 기피한다는 점도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9월 후보 시절 미국외교협회(CFR)에서 싱가포르,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두고 “사진이나 찍을 기회였다”고 했다. 이벤트성 협상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칫 한미 공조에 엇박자를 노출할 위험성도 있다.
2018년 평창에서 시작해 2019년 하노이 ‘노딜’까지 이어진 정부의 평화 이벤트는 막을 내릴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새로운 대북정책을 공개하면 한반도는 다시 북-미 결전의 장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있다. 베이징 올림픽의 기회를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다. 다만 과거처럼 이벤트에 집중하기보다는 실질적인 성과에 집중할 수 있는 차분한 대화를 기획해야 한다. 과거의 대북정책을 냉정히 검증하고 다음 정부에 넘겨줄 교훈을 찾는 것에 무게를 둔 임기 말 대북정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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