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 없다는 것은 가난한 것일까. 시인 이상(1910∼1937)은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이상에게 비밀은 너무나 많다. 오늘날 많은 연구자는 ‘이상의 비밀’을 풀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박제된 천재’를 위한 헌사는 너무나 많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 가면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라는 이색적인 전시를 볼 수 있다. 전시장 초입에서 이상이 차린 제비다방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물론 제비다방과 관련된 사진은 남아있지 않지만 이상의 자화상이 걸려 있었다는 증언은 있다.
이번 전시에서 눈길을 끄는 그림 하나가 있다. 바로 구본웅(1906∼1953)이 그린 ‘친구의 초상’(1935년경)이다. 화가는 친구인 시인 이상을 모델로 하여 초상화를 그렸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조는 암울한 시대를 반영한 것인가. 게다가 속도감 있는 거친 붓질은 시인의 내면세계를 짐작하게 한다. 모자를 쓰고 파이프를 문 모습. 얼굴 역시 어두운 그늘로 가득하다. 게다가 빨간색 입술은 초상을 더욱 괴기스럽게 한다. 정면상이기는 하나 시선은 정면을 응시하지 않고 있다. 삐딱한 시선. 직시하기에는 뭔가 불만이 많은 시대인가 보다. 이상 초상화의 특징은 왼쪽 뺨 부분이다. 이 부분만 강렬한 조명을 한 것처럼 하얗게 밝은 색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두운 색이다. 특히 코 아래 턱 부분은 새까맣다. 무엇 때문에 콧잔등과 왼쪽 뺨만 하얗게 처리했을까. 마치 화상 입은 상처처럼 보인다. 하지만 화가의 의도가 시인의 내면세계를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마음의 화상이다. 커다란 상처다.
이상은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나왔지만 원래 화가 지망생이었다. 당시 그는 ‘자화상’(1928년)을 그렸다. 얼굴은 좌우대칭도 아니고 게다가 왼쪽 동공을 그리지 않고 까맣게 처리했다. 강렬한 명암 대비는 구본웅의 초상화와 연결된다. 이상은 제10회 조선미전(1931년)에 ‘자화상’을 출품하여 입선했다. 시인의 자화상은 각별하다. 흑백도판으로 남아있지만 이 그림은 분방한 필치에 다채로운 색채를 구사했을 것 같다. 자화상과 초상화. 이들은 얼굴을 그린 것이지만 결국 자존의식의 조형적 표현이다. 고뇌에 찬 시인의 초상은 시대의 상징이기도 하다.
구본웅과 이상은 신명학교 입학 동기다. 어려서 사고로 척추를 다친 화가와 키다리 시인이 함께 길을 걸으면 동네 꼬마들이 곡마단 왔다고 뒤를 따라다녔다. 구본웅은 부친이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을 이상의 편집으로 발행하게 했다. 이들은 잡지에 글과 그림을 함께 발표하면서 우정을 돈독하게 했다. 구본웅의 대표작은 ‘여인’(1930년)으로 나신의 여성 상반신을 그린 작품이다. 활달한 필치로 거칠게 표현한 인체 묘사는 구본웅의 개성이 잘 드러나 있다. 빨강과 파랑의 거침없는 구사, 특히 왼쪽 얼굴의 부분적 하양은 이상 초상화와 연결되는 화법이다. 그렇다면 우정의 징표 ‘친구의 초상’ 왼쪽 얼굴은 왜 하얗게 처리돼 마치 황달 걸린 것처럼 ‘상처’를 지니고 있을까.
이미지 변색 부분의 확인을 위해 그동안 이 작품을 촬영한 사진도판을 추적해 보자. ‘친구의 초상’이 대중과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잡지 ‘문학사상’ 창간호(1972년) 표지다. 이때의 작품에는 왼쪽 뺨의 이른바 황달 현상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무렵의 박성은 논문의 도판은 현재의 모습처럼 코 아래 부분이 까맣다. 이 작품은 1972년 11월 국립현대미술관이 구입했고, 두 번에 걸쳐 보존처리했다. 1982년은 표면을 덮은 백화현상을 제거하고 왁스배접을 했다. 1989년 현재 모습으로 되살린 이후 지금까지 색상 변화는 없다. 왁스배접은 19세기 이래 북유럽에서 시도해온 것으로 불안정한 물감층을 보완하기 위한 기법이다. 그러니까 왁스, 천연수지 등 혼합한 용액을 열과 압력으로 작품 후면에 새로운 천을 부착하여 원래 작품을 보강하는 기법이다. 마침 ‘문학사상’은 창간 반세기 만에 현재의 ‘친구의 초상’을 표지화로 다시 사용했다(통권 581호).
이상과 구본웅. 이들 사이에는 한 여성이 있다. 바로 변동림이다. 변동림의 이복 언니가 바로 구본웅의 부친과 결혼한 사이다. 신여성 변동림은 자연스럽게 이상과 가까워졌다. 이상은 문제의 ‘오감도’ 같은 실험적인 시 연작과 소설 ‘날개’를 발표한 문단의 기린아였다. 변동림의 눈에 이상은 이랬다. “우뚝 솟은 코와 세 꺼풀진 크고 검은 눈이 이글거리듯 타오르고 유난히 건강한 청년”이었다. 그러니까 각혈하는 등 ‘폐인’은 아니었다. 이들은 방풍림이 있는 숲속을 거닐면서 사랑을 키웠다. 이들은 동소문 밖에서 밀월에 들어갔다가 1936년 6월 초순 신흥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이상은 신부를 서울에 두고 도일(渡日)했다. 이들의 밀월 생활은 3개월에 불과했다.
27세의 이상은 도쿄에서 요절했다. 데드마스크는 화가 길진섭이 석고로 떴다. 변동림은 1944년 5월 화가 김환기와 재혼했고,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꾸었다. 오늘날 미술시장에서 최고 가격으로 팔리고 있는 김환기의 뒤에 있는 ‘위대한 여성’ 김향안의 존재를 잊을 수 없다. 이상, 구본웅, 김향안, 김환기. 한 시대는 이렇게 흘러갔다. ‘상처’ 난 얼굴의 이상 초상화는 암울한 시대의 상징이다. 여기서 김광섭 시인의 시 구절이자 김환기 대표작의 제목이 떠오른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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