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의 기원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북방기원론을 많이 떠올린다. 해양을 통한 남방 지역과의 관련도 적지 않지만 유독 우리 기억에는 북방기원설이 더 친숙하다. 지형적으로 볼 때 한국은 북쪽으로 유라시아 대륙과 맞닿았으니 유라시아 각지의 다양한 문화와 선진기술은 한국의 북쪽으로 올 수밖에 없다. 실제로 고고학 자료로 보아도 한국의 청동기와 쌀농사 등 수많은 문화는 한국의 북쪽을 통해서 들어왔다.》
이런 북방에 대한 기억은 삼국시대에도 계속되었다. 북부여, 부여, 고구려, 백제 등 신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를 세운 사람들은 자신들이 북부여계에서 기원한 하늘의 후손(天孫)이라고 보았다. 백제도 마찬가지로 삼국사기에 백제의 건국자 비류와 온조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후손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백제의 고고학 자료는 오로지 고구려와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돌무덤(적석총)만 있었을 뿐 부여 관련 유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최근 경기 김포시 운양동과 충북 청주시 오송읍에서 속속 부여의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어렴풋하던 백제와 부여의 관계에 실마리가 잡히고 있다. 부여계 이주민들은 거대한 세력이 내려와 백제를 정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소규모로 다양하게 내려와 현지화하면서 백제로 성장했다. 이렇듯 북방지역과의 관련은 우리의 기원이 순수한 단일민족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고 이주하며 각 지리 환경에 적응한 것임을 보여주는 예이다.
백제시대 무덤서 의외의 발견
2016년 청주 오송역 근처에 생명과학단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760여 개나 되는 1800년 전 백제의 무덤들이 발굴되었다. 그중 15지점의 17호라고 명명된 평범한 백제의 움무덤에서 손잡이가 특이한 칼이 발견됐다. 이런 손잡이는 남한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놀랍게도 중국 지린성에 위치한 라오허선이라고 하는 초원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부여 유적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부여는 현재 중국의 지린시에 수도를 두었지만 윷놀이를 연상하는 사출도라는 조직을 두고 그 안에는 농사와 유목을 하는 다양한 집단이 지역을 달리하며 공존했다. 라오허선 유적은 부여 안에서도 유목문화가 발달하고 강력한 무기를 주로 사용하던 사람들이 남긴 것이다. 라오허선의 칼은 말 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돌기가 달린 손잡이를 붙였다. 부여 이외에는 전혀 발견된 적이 없던 이 부여의 칼이 뜬금없이 청주 오송의 백제(또는 마한)무덤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오송의 무덤에서는 이 칼 이외에는 부여계통의 유물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청주 오송의 부여 칼은 어쩌다가 백제의 무덤에 들어가게 된 것일까. 쉽게 보이지 않는 유물의 디테일에서 답을 얻는 것이 고고학자들의 역할이다. 그 실마리는 다름 아닌 유물 안에 있었다.
대대로 전해서 썼던 부여의 칼
오송의 부여 칼은 찬란한 명품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손잡이는 얼마나 썼는지 그 돌기는 반질반질하게 되어 있고 칼은 몇 번이나 바꾸어서 갈았다. 나중에는 손잡이 끝을 자르고 그 끝으로 칼을 휘어서 임시로 고정시켜 사용할 정도였다. 당시 이 칼을 그 오랫동안 수리를 반복하며 사용했다는 뜻이다. 청주 오송 무덤은 라오허선 유적보다 약 200년이 늦다. 그러니 어림잡아도 수세대에 걸쳐서 사용했던 것이다.
백제에서 부여계 유물이 나온 건 청주 오송이 처음은 아니었다. 김포시 운양동과 서울 풍납동 백제 왕성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부여 계통의 유물이 많이 출토된 김포 운양동은 바다와 맞닿은 곳이다. 역사 기록에도 백제의 초기 세력은 십제라고 해서 다양한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왔다고 하니 김포 지역에서 부여계통의 유물이 많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북쪽에서 내려온 이주민들이 백제에서 살았음을 청주 오송 유적이 다시 증명했다. 이렇듯 부여계통의 사람들은 백제 곳곳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남아있는 부여계의 유물은 몇 점 안되고, 그나마 수백 년을 쓴 칼이나 작은 귀걸이들에 불과하다.
오송의 부여 칼이 주는 더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백제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는 데에 있다. 당시 백제의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다는 뜻이다. 당시 긴 칼은 무사들의 상징이었다. 그러니 그 오랜 기간 이 무덤의 주인이 부여의 칼을 사용하는 것을 당시 주변 백제 사람들이 어색하게 보지 않고 인정했다는 뜻도 된다. 이 칼 한 자루 이외에는 어떠한 부여계통의 유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북방지역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토착사회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현지 사회에 정착하여 그 일부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고구려와 부여에서 내려온 일파들은 현지에 동화되면서 자신들은 북쪽에서 내려왔음을 잊지 않고 살았다. 이후 그 이주민들이 중추세력 중 하나가 되면서 백제의 주요한 건국신화로 부여가 등장하게 되었다. 다양하고 복잡하게 기록된 백제의 북방기원 신화는 사실 다양한 북쪽에서 온 이주민들이 한강유역으로 내려와 현지화하며 공존하는 과정이었다.
우리의 기원은 교류에 있다
우리는 흔히 한민족의 기원이라면 북쪽이건 남쪽이건 어느 한 지점에서 사람들이 밀려온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고고학이 증명하는 기원은 그렇게 일방적인 기원지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오송의 부여 칼은 부여와 고구려 계통이라고 기록된 삼국시대 건국 신화의 시작이 사실 북쪽에서 이주해온 작은 집단의 소속감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삼국시대 여러 나라가 공통적으로 북방지역에서의 기원을 강조한 것은 당시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와 통치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것이지, 한국인의 전체 문화가 북쪽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었다.
기원은 순수한 자신만의 고립된 혈통이나 문화가 아니다. ‘순수’한 기원을 어딘가에서 찾거나, 주변과의 교류를 무시하고 오로지 자체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 한민족의 기원은 주변과 단절된 순수함이 아니라 서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각자의 지리환경에 맞게 적응한 생존력에 있다. 수많은 문화와 인적 교류 중에 어떠한 경우에도 한국이라는 지리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면 결국은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게 거대한 용광로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번성하는 그 과정이 우리가 그토록 찾는 한민족의 기원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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