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타 거위그 감독 영화 ‘작은 아씨들’(2019년)은 주인공 조가 뉴욕 한 잡지사 문을 열고 조심스레 걸어 들어가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작가를 꿈꾸는 조는 이곳에서 편집자 대시우드에게 직접 쓴 소설을 건네고, 게재 약속과 함께 고료 20달러를 받는다. 신이 난 조가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뉴욕 거리를 내달리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그의 들뜬 표정과 대조적으로 조 앞에 놓인 현실은 간단치 않다. 대시우드는 그의 원고를 사정없이 난도질하며 이렇게 말한 참이다. “막 전쟁을 겪은 나라예요. 사람들은 설교가 아니라 즐거움을 원하죠. 요즘 세상에 도덕은 안 팔려요.” 앞으로 좀 더 ‘짧고 자극적인’ 글을 쓰라고 조언하며 대시우드는 이런 주문도 덧붙인다. “주인공이 여자라면 끝에 꼭 결혼을 시키세요. 아니면 죽이든지요.”
이 영화 원작은 1868년 루이자 메이 올컷이 발표한 동명 소설이다. 대시우드의 말은 남북전쟁(1861∼1865) 직후 미국 현실을 생생히 보여준다. 사회 곳곳에 자유와 활기가 넘치고 ‘도덕’은 흘러간 옛 얘기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여성에게 허락된 운명은 여전히 ‘결혼’ 아니면 ‘죽음’뿐이다. 이 시대 작가가 되고자 분투하는 조의 모습을 보면, 바로 그 시대 활동한 미국 화가 윈즐로 호머(1836∼1910)의 한 작품이 떠오른다.
호머는 남북전쟁 시절 종군 화가였다. 전장을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들로 명성을 얻었고, 1865년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 회원이 됐다. 일찌감치 성공 가도에 접어든 그가 종전 후 관심을 둔 건 미국 사람의 구체적 삶이었다. 호머는 화구를 챙겨들고 집 밖으로 나가 눈에 보이는 풍경을 그렸다. 1870년 발표한 ‘매사추세츠 맨체스터 이글 헤드’도 그렇게 완성한 작품이다.
그림 배경은 매사추세츠의 한 바닷가. 여성 세 명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들의 드레스가 하나같이 물에 흠뻑 젖은 걸 보면 막 해수욕을 마친 듯하다. 한 여성은 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치마를 걷어 올려 물기를 짜고, 다른 여성은 모래사장 위에 털썩 주저앉아 신발을 매만지고 있다.
이 작품은 공개 즉시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 여성들 맨다리가 훤히 드러난 게 특히 문제가 됐다. 당시 여성들은 해수욕할 때조차 정숙할 것을 요구받았다. 코르셋과 속바지를 갖춰 입고 그 위에 드레스까지 걸친 채, 익사하기 딱 좋은 차림으로 헤엄을 쳤다. 호머의 작품은 이 사회적 규범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음을 세상에 보여줬다.
당시 사회가 이를 호락호락 용납하지는 않았다. 얼마 후 미국 잡지 ‘에브리 새터데이(Every Saturday)’에는 이 유화를 대대적으로 수정한 그림이 실렸다. 이제 해변의 여성들은 종아리를 다 가리는 바지를 입고 있다. 현재 이 그림은 두 버전이 다 남아 비교의 재미를 준다.
거위그 감독은 ‘작은 아씨들’ 개봉 무렵 미국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구상하며 조와 동시대를 산 화가 호머의 그림을 많이 참고했다”고 밝혔다. 뉴욕 거리를 내달리는 조의 자신만만한 표정 위에는, 호머가 담아낸 해변의 여성들 모습이 겹친다. 권위적 도덕주의 안에서 자유를 꿈꾼 이들은 시대를 넘어 영감의 주인공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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