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향한 아내의 절절한 연가다. 봄이 무르익으면서 이곳 진 지방은 뽕나무 가지가 늘어질 만큼 잎이 무성하다. 하지만 남편이 있는 북녘 땅 연 지방 풀들은 이제 겨우 실처럼 가느다랗게 돋아났으리. 그만큼 춥고 척박하고 그래서 더 삶이 고달플 남편의 안쓰러운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 어떤 다정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두 사람 간의 아득한 거리를 좁혀줄 묘약은 바로 텔레파시다. 당신이 간절하게 귀향을 꿈꾸는 그 순간이 바로 내가 그리움으로 애간장을 태우는 시각이라고 아내는 스스로를 다잡는다. 이 끈끈한 연대감을 재확인하며 그는 남편의 부재를 감내한다. 한데 홀로 된 적막감을 일깨우기라도 하듯 비단 휘장 안으로 살랑살랑 봄바람이 집적대고 들어온다. 우린 서로 모르는 사이라 애써 부정하는 과장된 변명이 애교처럼 귀엽다고나 할까. 낯선 사내에게 물 한 바가지 건넸던 우물가 여인도 그랬다. ‘평양성에 해 안 뜬대두 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김동환 ‘웃은 죄’) 두 여인의 순박함이 어금버금하다.
음주와 신선을 노래했던 호탕한 시풍과 달리 이백이 이번에는 한 여인에게 감정이입을 시도했다. 이를 대언체(代言體) 시라 하는데 대개 여성, 농민, 병사 등의 입장을 대변했다. 약자를 배려한 측면이 있는 반면 시적 대상을 희생과 인내의 화신처럼 여기는 남성 우월의식을 드러냈다는 비판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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