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선발고교야구대회(봄 고시엔)에 처음 진출한 한국계 민족학교 교토국제고를 취재하러 23일 교토에 갔을 때의 일이다. 교토역에서 택시를 타고 주소를 말하자 기사는 “교토의 야구 명문고를 잇달아 꺾은 대단한 학교”라고 말했다. 현재 교토에 있는 고교 수는 100개. 학생 수 131명에 불과한 교토국제고가 어느새 택시 기사도 아는 유명 학교가 돼 있었다.
일본에서 고시엔 인기는 프로야구 못지않다. 공영방송 NHK가 모든 경기를 생중계한다. 지상파 TV들은 저녁 뉴스에서 빼놓지 않고 고시엔 경기 결과를 분석한다. 우승이라도 하면 거의 전 국민이 그 학교 이름을 알게 된다. 한국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고교야구가 큰 인기를 끌었지만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인기가 빠르게 식었다.
일본에선 왜 고시엔이 인기 있을까. 기자는 ‘폭넓은 저변’을 특히 주목한다. 지난해 말 기준 일본 국내 고교 수는 4874개인데, 그중 야구부가 있는 곳이 3940곳(81%)이다. 야구에 관심이 있으면 누구나 야구부원이 될 수 있고, 그 야구부는 예외 없이 ‘고시엔 진출’을 목표로 삼는다. 체육특기생뿐 아니라 일반 고교생도 누구나 꿈꿀 수 있는 것이다. 참고로 한국은 현재 2367개 고교 중 84곳만 야구부가 있다(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등록 기준).
더 근본적으로는 학업과 스포츠를 병행하는 분위기를 들 수 있다. 일본은 초등학생 때부터 동네 학부모들이 자체적으로 클럽을 조직해 자녀가 스포츠를 배우게 한다. 클럽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대단한 게 아니다. 학부모들이 전문 코치 한 명을 모셔 상급반 아이들을 지도하게 하고, 자신들의 재능 기부로 하급반 아이들을 가르친다. 회비는 한 달에 4000엔(약 4만1000원) 수준.
친한 일본인 기자는 “고교 2학년까지 거의 매일 야구를 했다”고 했다. 그러고도 그는 도쿄에 있는 명문 사립대를 일반 전형으로 입학했다. 학교 수업 시간 외에는 영어, 수학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한국에선 상상하기 힘들다.
학업과 스포츠를 병행하는 것은 그만한 스포츠의 매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자는 고시엔에서 본 선수들의 ‘배려’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고시엔은 인사로 시작해 인사로 끝났다. 경기가 끝났을 때 하는 인사는 대체로 이긴 팀이 허리를 더 숙였고, 진 팀 선수들이 고개를 들어야 허리를 세웠다. 양 팀 인사 후 승리 팀은 외야를 바라보며 홈 앞에, 패한 팀은 1루나 3루 쪽 더그아웃 앞에 일렬로 선다. 이긴 팀 교가가 운동장에 울려 퍼질 때 진 팀 선수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상대 팀 교가가 끝날 때까지 부동자세를 꼿꼿하게 유지했다. 그게 승리 팀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교가가 끝나면 각 팀은 자기 학교 응원단 쪽으로 달려와 인사를 한다. 기자가 착각했을 수도 있지만 교토국제고 응원단은 이긴 첫 경기(24일)보다 패한 두 번째 경기(27일)에서 더 큰 박수를 보냈다. 안타깝지만 너무나 잘 싸웠다는 메시지일 것이다.
일본 야구의 전설 오 사다하루(王貞治) 소프트뱅크 야구단 회장은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야구는 투수와 타자의 1 대 1 승부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한 사람과의 승부에서 이기더라도 경기에서 이길 순 없다. 동료들과 힘을 합쳐야 비로소 경기에서 이길 수 있다.” 봄 고시엔에 진출한 32개교뿐 아니라 고시엔 진출을 위해 예선전에서 실력을 겨뤘던 3940개 고교가 오 회장의 말을 몸소 체득했을 것이다. 공부만 해선 알 수 없는 그런 교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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