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논점/허진석]이해충돌방지법 20년 제자리… “국회-지방의원 견제가 핵심”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31일 03시 00분


미적대는 여야, 31일 법안심사 재개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16일 오전 국회 정문 앞에서 이해충돌방지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16일 오전 국회 정문 앞에서 이해충돌방지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허진석 논설위원
허진석 논설위원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땅 투기 의혹으로 그 어느 때보다 이해충돌방지법 제정의 필요성이 부각됐지만 여야 국회의원들은 3월 국회에서 처리하지 않았다. 이해충돌방지법은 공직자가 함부로 사익을 좇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들을 담고 있다. 여야가 31일 심사를 재개하기로 했지만 시민사회는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국회 처리가 무산된 데다 4·7 재·보선 이후 정국이 대선 체제로 전환되면 이해충돌방지법 이슈가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 전 슬그머니 심사 중단

정치권에서 이해충돌방지법에 드러내놓고 반대하는 목소리는 없다. 서울·부산시장 선거 여론조사에서 열세로 나오는 더불어민주당이 도입을 더 서두르고 있을 뿐이다. 야당인 국민의힘은 도입에 찬성하면서도 제정법인 만큼 좀 더 신중하자는 입장이다.

겉으로는 야당이 지체시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여야를 막론하고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법안에 미온적일 수밖에 없다는 게 한국투명성기구 등 시민단체의 판단이다. 이번 법안은 지난해 6월에 제출됐지만 그동안 심사를 하지 않다가 3월 초 LH 사태가 발생하자 부랴부랴 공청회가 열렸고, 법안 심사가 시작됐다. 법안심사 소위는 24일 오전에 이어 오후에도 열릴 예정이었지만 결국 슬그머니 중단됐다.

법 있었다면 LH사태 막았을 것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해충돌방지법이 있었으면 LH 사태를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는 지적이 많다. 법에 따르면 신도시 개발 업무 관련 공직자들은 관련 부동산 거래를 사전에 신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직무상 비밀을 이용해 재산상의 이득을 취했다면 7년 이하의 징역이나 7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는 강력한 처벌도 효과를 발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법은 반부패권익위법이나 청탁금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과 달리 사전 예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공직자가 사적 이익을 추구했는지를 증명할 필요 없이, 관련 신고의 미비만으로도 처벌할 수 있다.

이해충돌방지 조항은 원래 청탁금지법에 들어 있었다. 그래서 2013년 발의 당시 명칭은 ‘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 이해충돌방지 법안’이었다. 국민권익위가 법무부 감사원 등 8개 기관의 의견을 수렴하고, 시민단체들과 토론해서 만든 안인데 국회에서 이해충돌 부분이 통째로 빠졌다. 국회의원이나 중앙부처 공무원의 업무는 그 범위가 넓기 때문에 업무가 사실상 마비될 수 있다는 주장 등에 밀렸다.

그나마 청탁금지법이라도 통과된 것은 세월호 참사의 영향이 컸다. 사고 원인 중 하나로 감독 부실이 거론됐고, 해양수산부의 사무를 위탁받는 관련 협회에 퇴직공직자들이 취업한 것이 문제가 됐다. 이에 퇴직공직자의 취업 제한 제도를 강화하는 공직자윤리법 개정과 청탁금지법 제정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거셌던 것이다.

이해충돌방지는 부패방지와 한몸이어서 2001년 부패방지법 제정 때 도입됐어야 했다. 신봉기 한국부패방지법학회장(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은 “이해충돌방지는 2000년 초부터 논의가 있었지만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해 법안에 반영되지 못했다”며 “사실상 20년째 이해충돌방지 논의가 맴돌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내달 처리 못 하면 로드맵 제시를

여야가 법안 심사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으니 4월에는 처리될 가능성도 있다. 24일까지 3차례 진행된 법안심사 소위에서는 ‘직무상 비밀 이용 금지’ 조항에서 ‘비밀’을 ‘미공개 정보’로 확대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직무상’도 없애서 LH 사태에서처럼 동료로부터 취득한 정보를 포함시키자는 의견도 나왔다. 이해충돌방지법은 LH 사태 이전에 제출돼 보완해야 할 사안이 있을 수 있다. 더 신중하게 논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제대로 더 논의할 수 있다. 다만 여야는 마감 시한을 정한 일정표라도 제시해서 국민들의 불신을 잠재워야 한다.

국회의원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는 이해충돌방지법의 처리가 더딘 것에 대해 시민단체가 보는 눈은 곱지 않다. 이상학 한국투명성기구 대표는 “공직자는 공무원 행동강령과 감사원 감사 등으로 견제라도 받지만 국회의원과 지방의회 의원들은 권력에 비해 감시가 약하다”며 “국회의원과 지방의회 의원이 핵심인 만큼 논의 도중 대상에서 빠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해충돌방지법은 조문이 많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너무나 상식적인 주문들이다.

美는 반세기 앞서 도입… 위반땐 최대 5년刑


이해충돌방지법은 선진국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도입돼 있다.

미국은 1962년 제정한 ‘뇌물, 부당이득 및 이해충돌방지법’을 통해 공직자 자신 및 가족 등의 재정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특정 사안을 회피하지 않고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향후 고용될 수 있는 단체도 이해관계 대상에 포함된다. 이를 위반하면 고의성이 있을 경우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고의성이 없는 단순 참여라 할지라도 1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금융회사 조사관 등이 조사 대상 은행 등으로부터 대부금이나 사례금을 받으면 1년 이하 징역이나 벌금에 처한다. 또 2009년 별도의 행정명령으로 공직자로 임용되기 전의 사용자 또는 고객과 직접적 실질적으로 관련된 특정 업무를 공직 임용 후 2년간 수행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프랑스는 ‘공무원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1983년 7월 13일의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이해충돌을 방지하고 있다. 객관적인 직무수행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론이고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보여도’ 이해충돌 상황이 성립한다는 규정까지 두고 있다.

캐나다는 2006년 ‘공직자의 투명성과 이해충돌방지법’을 제정했다. 공직자의 가족이 공직자와 유관한 기관과 고용계약을 맺는 것은 금지되고, 친인척에 대한 계약 발주도 제한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이해충돌방지 가이드라인에서는 공무와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사적 이해관계를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신고하는 절차를 만들 것을 권고하고 있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이해충돌방지법#국회#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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