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 이성과 감정의 싸움[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31일 03시 00분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이 글을 읽으시고 마음의 안정을 조금이라도 찾으셨으면 합니다. 요새 좋든 싫든 선거 분위기에 좀 피곤합니다. 투표일이 지나야 벗어날 것 같습니다. 누구를 뽑을 것인가, 내 마음은 내가 다스려야 합니다. 미묘한 흔들림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남의 의도에 내 마음이 넘어갑니다. 내 자존감이 상처를 입을 겁니다.

말로는 유권자를 존중한다고 하지만 정치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내 한 표는 그저 한 표일 뿐. 투표가 감정적인 행위라는 점도 꿰뚫고 있습니다. 투표의 주역은 이성이 아닌 감성, 의식이 아닌 무의식입니다. 따라서 선거 막판에는 마구잡이 말들이 난무합니다. 부정적인 이미지를 상대방에게 씌워서 유권자의 감성과 무의식을 자극해 판세를 유리하게 하려는 전략입니다.

모든 선거운동본부는 각종 전략을 열심히 짜내서 써먹습니다. 첫째, 불안 분노 공포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유권자가 경쟁 후보에게 느끼도록 노력합니다. 우리 후보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 한 가지보다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 한 가지가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둘째, 편을 가르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지지층에게는 소속감을 부여하면서 자존감을 높여줍니다. 그러면 지지층이 알아서 상대편 사람들을 적대시하니 일거양득입니다. 지연과 학연은 기본이고 이득만 있다면 어제의 원수도 오늘의 친구로 거론합니다. 정치적 태만함을 숨기기에도 편 가르기가 좋습니다. 셋째, 언어의 연상 작용을 활용하는 미묘한 전략도 있습니다. 연구에서 입증이 되었습니다. 상대방을 일단 혐오스러운 냄새를 풍기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진화 과정에서 나쁜 냄새는 곧 질병이므로, 나쁜 냄새를 떠올리는 단어는 본능적으로 혐오감과 연결됩니다. 넷째, 시간이 촉박하니 자극적인 말들을 적극적으로 씁니다. 산만하던 청중의 집중력이 확 올라가고 그들의 귀에 쏙 들어가면서 언론에도 보도됩니다. 선거 운동에서 저지르는 ‘말실수’는 실수가 아닌 의도된 계획의 결과입니다.

유권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선거 운동에서 경쟁 후보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집요하게 하는 숨은 의도는 과연 무엇인지를 합리적으로 의심해 봅니다. 그렇게 할 권리가 당연히 유권자에게 있습니다. 둘째, 그 이야기가 선택을 좌우할 정도인지를 따져 봅니다. 뿌리도 아닌 가지에 마음이 흔들리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셋째, 뽑아야 할 후보를 결정하면 됩니다. 정 어려우면 안 뽑아야 할 사람을 정합니다. 성격도 중요하니 편협하거나 옹졸한 사람은 좋은 선택이 아닐 겁니다. 입이 사납고 험하면 구변이 좋은 것이 아니고 대인관계에 장애가 있는 겁니다. 빈정대며 비꼬아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별로입니다. 넷째, ‘정치 공학’의 교묘하고 솜씨 좋은 수법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공부가 좀 필요합니다. 지식을 갖춘 유권자만이 존중받습니다. 느낌만으로 뽑으면 쉽고 편하지만 실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식에 바탕을 두고 투표하려는 유권자가 늘어날수록 앞날이 밝아집니다. 다섯째, 말씨로 사람을 판단하는 능력도 길러야 합니다. 부드럽고 점잖은 말로 할 말을 다 하는 사람이 있다면 뽑아도 후회가 없을 겁니다. 여섯째, 사람들은 자신이 던지는 한 표가 미미하다고 생각합니다. 통계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투표는 해야 합니다. 그래야 결과에 따른 무력감이나 좌절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 후회를 덜 합니다. 능동적으로 살아야 수동적으로 사는 것보다 마음이 건강해집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기대와 달리 투표의 주역은 감정이고, 구체적인 행위는 내적 편향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집니다. 내적 편향성은 일찍부터 마음에 새겨진 가치와 믿음으로 행동 기준이 됩니다. 합리적인 판단으로 보이는 경우도 얻을 수 있는 정보와 인지 능력의 제한성으로 인해 주관성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념적 성향도 자신의 성격에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어떤 이념도 모든 정책에 차질 없이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 이념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후보자가 내세운 특정 정책이 반드시 시행된다는 보장도 없고 책임을 물어보았자 허망할 겁니다. 내가 하는 투표가 내적 편향성과 느낌에 따른 결정이어도, 때로는 직관이 더 정확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자신의 성향과 판단을 성찰하려는 태도는 중요합니다. 그러면 실수를 줄일 수 있습니다.

투표는 이성과 감성의 싸움이자 의식과 무의식의 다툼입니다. 비이성적인 이유가 이성적인 이유를 앞선다는 설이 우세합니다. 결국 투표는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고 하는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투표#이성#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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