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님은 화가에게 무엇이든 마음대로 그리라 했다. 그래서 화가는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그렸다. 하지만 임금님은 크게 화를 내며 해당 화가를 파면시키고 아예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정조 12년(1788년)에 일어난 희한한 사건이다. 궁중화원 시험 주제는 8폭 병풍 그리기, 그림 내용은 자유였다. 이에 화원 신한평 등은 자유 제목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이는 국왕의 심기를 건드리는 결과를 낳았다. 문제의 핵심은 책거리를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국왕의 총애를 받는 화원은 마땅히 국왕이 제일 좋아하는 책거리를 그려야 했거늘 무슨 자유 제목인가. 여기서 유배 간 화원 신한평은 미인도로 유명한 신윤복의 아버지다. 책거리를 그리지 않아 궁중에서 쫓겨난 화원. 정말 해괴한 사건이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날 어전회의에서 정조대왕은 신하들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질문했다. 신하들은 책이 보인다고 대답했다. 이에 임금은 이것은 책이 아니고 그림이라고 말했다. 바로 책가도(冊架圖)의 탄생이었다. 태조 이성계의 조선 왕조 창업 당시부터 임금 자리의 그림은 일월오봉도 병풍이었다. 해와 달 그리고 다섯 산봉우리는 천지를 의미했고, 이는 곧 왕권의 상징이었다. 이런 일월오봉도 전통을 정조는 책가도 병풍으로 대신했다. 그러면서 학문과 고전 숭상을 강조했다. 독서할 시간이 없으면 책을 만져만 보라고도 했다. 18세기 문예부흥기에 유행하기 시작한 책가도. 처음에는 책꽂이에 책으로만 가득 채웠다. 이런 형식은 시간이 흐르면서 책 대신 각종 문방구류나 도자기 같은 사치품을 넣어 호사스러움을 자랑하게 되었다. 아예 책꽂이를 없애기도 했다. 바로 책거리의 유행이다. 왕실에서 유행하던 책거리는 민간으로 확대돼 조선 말기를 특이하게도 책거리 시대로 만들었다. 2016∼2017년 미국에서 성황리에 순회전을 열었던 책거리를 일컫는다. 독창성 으뜸의 그림, 채색화의 절정과 같은 그림, 바로 책거리다.
현재 가장 오래된 책가도는 화원 장한종(1768∼1815)이 그린 병풍이다. 장한종은 정조와 순조 시절의 자비대령 화원이었다. 궁중화원으로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그의 책가도는 무엇보다 구성의 짜임새와 치밀한 묘사 등 높은 화격(畵格)을 짐작하게 한다. 보통의 책가도와 달리 장한종의 작품은 무엇보다 장막으로 둘러쳐져 있다. 커튼을 여니 그 안에 책꽂이 가득 책과 갖가지 귀중품들이 다양하게 있는 모습이다. 장막 안의 책가, 특이한 구성법이다. 깜찍한 발상이다. 노란색 장막 안에 여덟 칸의 책꽂이가 보이고, 아래에는 문갑을 2개씩 두었다. 하지만 맨 오른쪽의 두껍닫이 문은 열려 있고 그 안에도 책이 있음을 암시했다. 서가의 시렁은 약간 변화를 주었고, 눕혀 보관한 한문 서적의 평면성에 비해 입체적인 기물을 사이사이에 배치했다. 아쉽게도 도자기는 조선 백자가 아니라 모두 중국 수입품이다.
화풍은 서양회화처럼 원근법과 입체감을 살리기 위한 음영법을 활용했다. 그래서 장한종 그림은 실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실감이 난다. 정조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경기 화성시 용주사 불화의 기법에서도 서양식 화풍을 엿볼 수 있다. 시대 상황의 변화를 느끼게 하는 사례다. 장한종의 병풍도 마찬가지다. 파격적 구성에 치밀한 묘사, 그것도 새로운 서양풍 기법까지 활용한 그림, 책거리 계열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다. 게다가 나이까지 제일 많다.
원래 궁중화원은 자신의 그림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른바 민화 종류에 화가 이름을 표기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공동체의 시각적 산물인 그림에 굳이 개인작가의 이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기도박물관 소장 책가도의 작가가 장한종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화가는 일종의 트릭을 사용했다. 그림 왼쪽 아래에 인장함을 두고, 거기 도장 하나에 ‘張漢宗印’이라고 표기했기 때문이다. 각종 기물 가운데 본인의 인장을 두었기에 작가명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화원 이형록의 경우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장한종과 이형록은 당대 최고 수준의 화원이었다. 화원은 중인 출신에서 선발했다. 조선 왕조의 최고 화가는 단원 김홍도였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김홍도, 그는 책거리 병풍에서도 동시대 최고라는 칭송을 들었다. 하지만 현재 그의 책거리 그림은 남아 있지 않다.
정조는 학문 숭상, 즉 인문학으로 통치술을 발휘하려 했다. 그런 결과로 책거리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미지를 통치의 수단으로 삼은 임금, 대단하다. 특히 조선 왕조는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나 인쇄술이 뛰어났다. 하지만 책방이 없던 사회였다. 머슴의 연봉을 다 주어도 천자문 하나 사기 어려웠다. 학문은 양반 사대부의 독점 분야였다. 즉, 책은 기득권의 상징물이었다. 책방 없는 나라에서 책을 그린 그림이 유행했다는 역설, 정말 시사하는 점이 많다.
오방색 등 원색을 좋아하는 조선 민족이다. 2차색인 간색(間色)을 좋아하는 일본인과 비교해 한민족은 정색(正色)인 원색을 좋아하는 민족이다. 이는 단청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민족 회화의 본령은 채색화에서 찾아야 마땅하다. 오늘날 10만 명 이상의 민화 인구는 민족적 색채 감성을 상징한다. 이른바 민화의 특징은 형식적으로 채색화이고 내용적으로는 행복추구, 즉 길상화(吉祥畵)다. 채색 전통 다시 보기. 지금 우리 시대에 떨어진 과제이기도 하다. 이에 장한종의 책가도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국제 무대에서 경쟁력 있는 우리의 채색화. 이제 세계적으로 각광 받는 한국의 채색화이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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