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크리스토를 기다리며[이승재의 무비홀릭]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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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잉 인 스타일’. 쥐꼬리 연금이 끊긴 세 노인이 천근만근 같은 몸을 이끌고 은행털이에 나선다. 사진 출처 IMDb
영화 ‘고잉 인 스타일’. 쥐꼬리 연금이 끊긴 세 노인이 천근만근 같은 몸을 이끌고 은행털이에 나선다. 사진 출처 IMDb
[1] 영화보다 영화적인 단어들이 있어요. ‘샤이 진보’가 그래요. 부끄러움 타는 진보? 시인 유치환의 ‘소리 없는 아우성’만큼이나 시적 허용처럼 들리는 합성어가 아니겠어요? 하긴, 호흡기 감염 바이러스로 한국이 초토화되는 내용을 담은 영화 ‘감기’(2013년)에서나 나옴 직한 살 떨리는 단어 ‘팬데믹’을, ‘해피’ ‘초코’ ‘뚱이’ 같은 동네 개 이름보다 흔하게 입에 달고 사는 오늘이니 말이에요.

이럴 땐 얼토당토않은 할리우드영화가 더욱 현실적이란 생각도 들어요. 2017년작 코미디물 ‘고잉 인 스타일(Going in Style)’만 봐도 그래요. 미국 철강회사 노동자로 30년 넘게 일하다 은퇴한 세 노인 윌리, 조, 앨버트. 쥐꼬리 같은 연금으로 노후를 근근이 살아가는 이들에겐 매주 목요일 4달러짜리 싸구려 뷔페에서 배를 채우는 순간이 유일한 행복이에요. 그런데 회사의 인수합병으로 연금이 끊기자, 생계가 막막해진 이들이 거동도 힘든 몸으로 은행털이에 나선다는 얘기예요.

아니, 이게 무슨 경칩 개구리가 뻐꾸기 날리는 소리냐고요? 의외로 현실적이지 않나요? 요즘처럼 부동산 보유세가 가파르게 오르고, 와이프보다 무섭다는 건보료를 죽을 때까지 짊어지는 은퇴자들이 늘어난다면, 벼랑 끝에 몰린 팔순 할아버지가 새마을금고를 털겠다며 효자손을 무기 삼아 떨쳐 일어나다 집 앞 빙판에 넘어져 돌아가시는 희비극이 현실에 있지 말란 법도 없잖아요?

[2] 복잡계에 속하는 현실은 간단치 않아요. 심지어 진심과 거짓으로도 일도양단 안 되어요. 이번 선거판처럼, 거짓말도 있고 거짓말의 거짓말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얼마 전 막을 내린 ‘결혼작사 이혼작곡’이란 드라마가 저는 카오스적 현실세계를 꽤나 잘 투사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에 등장하는 정신과 의사 이태곤은 인기 예능 프로 ‘나만 믿고 따라와, 도시어부’에서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멋져요. 가정적이고 미남인 데다 배운 것도 많고 돈도 많으며 마음도 따스하고 심지어 몸도 불룩불룩 좋지요. 그런데 이태곤은 완벽한 아내 박주미를 두고도 열여섯 살 어린 여배우와 바람을 피워요. 여배우와 섹스하고 귀가한 밤에 “당신을 너무 사랑한다”면서 아내와도 진심 어린 잠자리를 갖는 슈퍼히어로죠.

이제 아시겠지요? 이태곤은 가식이 아니에요.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여배우도 진심으로 사랑할 뿐이에요. 불륜에는 인과관계가 없다니까요? 아내에 대한 욕구불만 탓에 바람을 피운다고 믿나요? 아니에요. 바람은, ‘그냥’ 피우는 거예요. 진심과 사랑엔 총량이 없어요. 나눌수록 늘어나요. 세져요, 라는 게 (제가 아닌) 작가의 주장이지요. 어때요? ‘결혼은 이혼으로 완성된다’는 냉소가 깃든 이 연속극이 얼마나 무섭도록 현실적인지. 불륜은 주(主)가 아닌 종(從)이요, 필수가 아닌 옵션에 불과하다는 강박 같은 믿음이 현실 앞에선 얼마나 취약한지요.

[3] 따라서 우린 분노한 거예요. 자기 이익에 따라 투자와 투기를, 피해자와 가해자를, 정의와 적폐를, 연대(連帶)와 야합을, 로맨스와 불륜을 아름답게(?) 오가는 힘센 자들의 현실세계에서 여태껏 주인인 줄 착각하고 살아온 우리가 얼마나 머저리였는지를 깨달았으니까요. 어쩌면 세상은 인과도 없고(아니 결과가 원인이 되고) 선악도 없는(아니 악이 선이 되는) 부조리함이 진짜 얼굴인지도 모른다고요.

아, 이런 가치전복적인 세상에서 저는 ‘미스 몬테크리스토’란 일일극에 홀딱 빠지게 되었어요. 여기엔 고은조라는 ‘천사표’ 여자가 나와요. 그녀는 자기를 시기한 절친 오하라의 음모에 빠져 추락사하는데,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녀가 홍콩 거물 투자자의 양녀인 황가흔으로 신분을 속인 채 처절한 복수극을 펼친다는, 어디서 서른 번쯤 본 것 같은 스토리예요. 이 드라마엔 ‘해리포터’ 뺨치는 매직이 등장하는데요. 고은조가 똑같은 얼굴에다 아이라인만 엄청 진하게 그린 뒤 “제가 황가흔이에요”라고 자기소개를 한다고요. 근데 절친은 물론 과거 약혼자도 그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생태가 페라가모 신은 것 같은 판타지적 상황이 펼쳐진다니까요? 얼굴에 점 하나 찍고 딴 여자 된 장서희는 차라리 양반이라고요.

이 드라마에서 저는 위안을 얻어요. 현기증 나는 현실과 달리, 적어도 여기선 선과 악이 산뜻하게 구분되거든요. 그리고 나쁜 놈이 자기가 나쁜 놈이란 사실을 마음속으론 인정하거든요. 게다가 더더욱 놀랍게도, 선이 악을 이기는 기적도 펼쳐지거든요. 몬테크리스토! 오직 그대를 기다려요.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
#몬테크리스토#영화#샤이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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