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99년 5월, 소크라테스는 불경죄로 고소되어 재판을 받고 한 달 뒤 처형당했다. 그를 탈옥시키려던 친구들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계획을 무산시킨 것은 소크라테스 자신이었다. 그는 왜 탈옥을 거부했을까? 동료 시민들을 훌륭한 삶으로 이끄는 일을 천직으로 여겼던 달변의 철학자는 왜 재판에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지 못했을까?》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법에 따라 배심원들이 맡았다. 당일 아침, 6000명의 배심원단에서 추첨으로 뽑힌 500명이 재판정을 채웠다. 멜레토스를 비롯한 고소인들은 정치가와 장인, 시인, 연설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소크라테스 고소장에는 “나라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끌어들이며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고 적혀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평소 언행이 시빗거리였다. 그는 사람들의 종교적 믿음에 대해 자주 의문을 표시했고, 내면에서 다이몬의 소리가 들린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이를 가로막는 일종의 금지 명령이었다. 아테네 사람들 중 누가 그런 소리를 들었나? 소크라테스를 재판정에 서게 한 더 큰 문제는 ‘묻고 따지는’ 그의 대화법을 흉내 내면서 기성세대에 도전한 젊은이들의 행동이었다. 많은 아테네인이 보기에 젊은이들의 그런 도발적인 행동 배후에는 소크라테스가 있었다.
진실 알리려한 소크라테스 죽음
재판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죄의 유무를 결정한 뒤 형량을 정하는 것이 재판의 순서였다. 첫 단계에서 소크라테스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280 대 220으로 유죄 판결이 났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사형을 요구하는 고소인들 쪽으로 80표가 더 넘어갔다. ‘영빈관에서의 식사 대접’이 자신에게 합당한 벌이라는 소크라테스의 ‘황당한’ 주장이 배심원들의 심기를 거슬렀을 것이다. 배석한 친구들이 배심원 6000명의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액수(30므나)의 벌금을 물겠다고 제안을 수정했지만, 배심원들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었다.
그러니 대화의 달인이 배심원 설득에 실패한 이유는 굳이 따질 필요도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따르면 성공적인 연설을 위해서 연설가는 청중에게 자신에 대한 신뢰를 심어준 뒤 그들의 감정에 호소하면서 적절한 논변을 구사해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연설은 그런 연설과 거리가 멀었다. 연민과 공감에 호소하기는커녕 도발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 아무리 뛰어난 논변을 펼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지만 재판정의 철학자에게 사느냐 죽느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배심원들의 설득이 아니라 진실을 알리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독배를 마실 날이 다가와도 소크라테스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탈옥 준비를 마치고 찾아와 간청하는 친구 크리톤을 상대로 그는 탈옥의 정당성을 ‘묻고 따지고 시험’했다. ‘다른 나라로 떠날 자유가 허락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칠십 평생을 아테네에 머물렀다면, 이는 내가 이 나라의 법을 따르기로 약속한 탓이 아닌가? 이렇게 자율적으로 나라와 맺은 약속을 어기고 판결을 부정하면서 법의 효력을 훼손한다면, 이는 나라에 해를 끼치는 일인데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재판정에서 ‘죽어도 좋다’고 큰소리를 친 철학자에게 탈옥은 자기 모순적 행동이었다.
소크라테스과 크리톤이 나눈 대화는 아직도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그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했을까? 대화가 담긴 ‘크리톤’에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비록 법에 따르는 판결이 잘못된 결정이라도 그것에 불복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 말은 개인의 모든 행동이 법에 구속된다는 뜻일까? ‘철학을 그만두는 조건으로 무죄 방면한다. 다시 철학을 하다가 붙잡히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내려졌다고 상상해 보자.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했을까? 실제로 그는 법정 연설에서 그런 판결을 가정하면서, ‘그래도 죽음을 감수하고 철학을 하겠다’고 단언한다. 법의 심판에 대한 두 발언 사이에 일관성이 없어 보일 수 있지만, 꼭 그렇게 단정할 필요는 없다. ‘법이 나의 신념과 행동을 구속할 수 없지만, 그에 따른 법의 처벌은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소신이었던 셈이다.
합법과 옳음 사이의 거리
소크라테스에 대한 배심원들의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다. 맞는 말이다. 그를 죽인 뒤 아테네인들도 후회했다. 아테네 성벽 출입문 근처에 그를 추앙하는 동상까지 세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재판의 잘잘못을 따지는 일과 별도로 우리가 놓치면 안 될 것이 또 하나 있다. 소크라테스는 합법적이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서 재판을 받았고 방어권도 충분히 행사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보면,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고집쟁이 철학자의 억울한 죽음 이상의 뜻을 갖는다. 그 재판은 합법적인 것과 옳은 것 사이의 깊은 틈새를 보여주는 사례다.
소크라테스는 시민의 숙고(熟考) 역량을 키움으로써 합법성과 옳음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 했던 철학자였다. 하지만 아테네의 민주정은 그런 노력을 단죄했다. 지금의 상황은 다를까? 21세기의 대다수 국가는 민주정을 정체로 내세우고 다수결의 원리를 받아들이지만, 다수의 잘못된 판단 가능성을 막는 데는 별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물론 지금도 다수의 결정을 옳은 것,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소크라테스의 후예들이 있고 ‘숙고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곳곳에서 들린다. 하지만 이런 노력과 요구는 더 많은 표를 얻기에 급급한 정치와 정치가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다수결의 횡포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다수결의 횡포, 공동체의 적
성찰 없는 다수의 결정만큼 ‘합법적으로’ 공동체를 해체하기 쉬운 수단은 없다. 열 명 중 여섯이 작당해서 넷을 제거할 수 있다. 남은 여섯 가운데 넷이 짜고 둘을 제거한다. 6:4, 4:2, 3:1, 2:1, 1:1. 다수결의 원칙을 절대시하는 태도에는 공동체 해체와 자기 몰락의 위험이 따른다. 집단의 크고 작음은 중요하지 않다. 옳은 결정, 더 나은 결정에 이르기 위한 ‘느린’ 숙고를 외면한 채 빠르고 세찬 다수의 주장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순간, 어디서나 야만으로의 길이 활짝 열리기 때문이다. 더 나은 판단과 더 포용적인 결정의 가능성을 무시한 채 관철되는 다수결은 맹목적 폭력과 배제의 힘일 뿐이다. 이런 힘이 언제, 누구를, 어떤 이유로 쓰러뜨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를 고소한 인물들은 어떤 운명을 맞았을까? 그의 죽음에 고소인들은 환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중에 멜레토스는 사형을 당했고 다른 자들도 추방되었다. 다수결에 의해서. 이 결정은 소크라테스의 죽음 덕분에 아테네인들이 더 성찰적이 된 결과였을까, 아니면 그 역시 대중의 감정에 휩쓸린 보복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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