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으로 유명하지만 교육에 대해서도 좋은 책을 남겼다. 그는 ‘미국의 고등교육’이란 책에서 대학(university)에서 학부대학(undergraduate college)과 직업학교(professional school)를 구분하고 인문학과 과학을 가르치는 학부대학보다 로스쿨이나 MBA 같은 직업학교가 중시되는 경향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오늘날 미국에서 성공하려면 명문 로스쿨이나 명문 MBA를 나오는 게 중요하다.
▷그랑제콜은 프랑스 고등교육 과정에서의 직업학교다. 프랑스 대학은 평준화돼 있다. 똑똑한 고등학생들은 대학에 가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명문 고등학교에 설치된 그랑제콜 준비반에 들어가 2, 3년을 더 공부한 뒤 그랑제콜로 직행한다. 정치인이나 고위직 공무원이 되고 싶으면 국립행정학교(ENA)로 가고, 이공계에서 리더가 되고 싶으면 에콜폴리테크니크로 간다. 고등상업학교(HEC) 같은 일종의 경영대학원들도 그랑제콜이다.
▷ENA는 1945년 샤를 드골 대통령이 새로운 프랑스 건설에 필요한 최고의 공무원을 키워내기 위해 설립했다. 드골 이후 프랑스 대통령은 7명이 나왔는데 그중 4명이 ENA 출신이다. 역대 총리와 장관 중에서도 ENA 출신이 수두룩하다. ENA 출신, 즉 에나르크(enarques)가 되는 것은 정관계에서 성공의 지름길이며 정관계와 인맥을 갖고 있어야 하는 재계에서도 성공의 지름길이다.
▷프랑스 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문화 자본’이란 개념을 만들어 현대 사회에서의 새로운 신분화를 우려했다. 문화 자본은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주는 문화적 능력으로 정의할 수 있다. 재산 못지않게 문화적 능력을 자녀 세대에 전수하는 것이 부모 세대의 특권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가 고소득 전문직인 학생이 빈곤층 학생에 비해 ENA에 입학할 가능성이 10배 이상으로 크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ENA 폐지론이 제기돼 왔다. 그 자신 ENA 출신인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8일 ‘사회적 이동성’을 높인다는 차원에서 내년 ENA 폐교를 발표했다.
▷ENA 폐교는 프랑스 특유의 소수정예주의의 종말로도 이해될 수 있다. ENA는 한 해 고작 80∼9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프랑스는 대체로 관공서건 회사건 소수의 간부들은 밤늦도록 일하고 대다수의 직원들은 정시에 퇴근해 여가를 즐기는 사회다. 간부가 될 자질을 가진 소수를 택해 나랏돈으로 특별대우를 해주는 대신 그들에게 대중을 끌고 갈 책임을 부여하는 프랑스 시스템에 한계가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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