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여정 첫 오스카 女조연상 후보
재능-감수성으로 영화산업 지탱한 배우들
관객과 소통 코로나 침체기 이겨낼 것
배우 윤여정이 4일(현지 시간)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로 미국배우조합(SAG)상 영화 부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아시아 배우로서 개인이 SAG상 영화 부문에서 수상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SAG 최고상인 앙상블상을 수상한 데 이어 2년 연속 한국 배우가 이 시상식 무대의 주인공이 됐다. 50년 이상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연기자의 길을 걸어온 70대 여배우는 수상 소감으로 비로소 서양인들, 동료 배우들에게 인정받았다는 데 대한 감격과 고마움을 전해 시상식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남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SAG 회원들은 아카데미 회원들과도 상당수 겹치기 때문에 윤여정은 25일로 다가온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에도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다.
할리우드 영화계가 전 세계에 미치고 있는 문화적, 산업적 영향력을 고려할 때 미국은 봉 감독의 언급대로 로컬(local)이되, 단순한 로컬은 아니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기 전인 2019년, 세계 박스오피스는 1위부터 10위까지 할리우드 영화가 차지했다. 물론 그 순위를 장식한 대다수의 프랜차이즈 영화들과 영화상 시상식에서 주목받는 작품들이 늘 교집합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계 유수의 영화인들과 영화팬들이 매년 아카데미를 주목하고 있으며 상업성과 별개로 훌륭한 작품들을 선정하고, 그 가치를 인정해 주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은 자명하다. 그 노력은 종종 새로운 인력의 발굴 및 소재와 장르의 개발로 이어진다.
따라서 한국 영화와 한국 배우가 미국에서 기록하고 있는 최초의 역사는 한국 영화사, 나아가 세계 영화사의 변곡점이 될 중요한 모멘텀이자 하나의 현상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백인 남성 중심의 할리우드 영화들이 자연스럽게 아카데미 수상 결과로 이어졌던 편협한 역사가 뒤집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영화인들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와 아카데미 시상식을 석권하며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기생충’은 ‘K무비’ 열풍으로 이어졌다. 팬데믹 시대에 더욱 활기를 띠고 있는 OTT 시장에서 조일형 감독의 ‘#살아있다’, 조성희 감독의 ‘승리호’ 등이 세계적으로 큰 관심과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데에는 ‘기생충’의 영향력이 밑바탕이 됐다. 이로써 그간 K팝, K드라마가 주도했던 한류에 이제 K무비도 당당히 흐름을 같이하게 됐다.
한국 영화의 성취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었던 최초의 유료 상영회를 영화의 탄생일로 볼 때, 한국인이 제작 연출 연기를 맡은 첫 영화, 김도산 감독의 ‘의리적 구토’ 상영일은 1919년 10월 27일로, 약 24년이라는 간극이 있다. 그만큼 출발이 늦었다는 얘기다. 검열과 탄압이 계속된 일제강점기는 우리 초기 영화사의 큰 장애물이었고, 광복 후 잠시 숨통이 트이는 듯했으나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으로 인프라가 파손되고 영화 인력도 흩어지는 등 어려움이 계속되었다. 이후 독재정권의 검열과 영화법도 우리 영화가 질적으로 성장하는 데 엄청난 걸림돌이었다.
이처럼 근현대사의 상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한국 영화계가 최근 눈부신 조명을 받고 있는 것은 우리 영화인들이 당대에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를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 영화계는 관객과 소통하며,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작가적 스타일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만들어 왔다. 이러한 영화사적 기반 없이는 봉준호도, ‘기생충’도 없었을 것이다.
윤여정의 아카데미 후보 선정, SAG상 수상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훌륭한 배우들은 우리 영화계의 자산이었다. 한국 관객들이 할리우드와 홍콩의 배우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한국 영화가 ‘방화’로 하대받으며 관객 점유율이 15%까지 떨어졌던 시절에도 배우들은 뛰어난 재능과 섬세한 감수성으로 무거운 우리 영화산업의 뒤를 받치고 있었다. 한국 영화사의 대표적 거장,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년)로 데뷔한 후 반세기 동안 지난했던 우리 영화사의 장면 장면을 함께해 온 윤여정이 한국 배우 최초로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것은 참으로 극적인 일이다. 그의 말대로 상은 이미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2019년 맞이한 100주년을 기점으로 다음 챕터를 시작한 한국 영화사의 첫 페이지는 이제 세계 영화사와 궤를 함께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극심한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위기 상황에서 늘 그래왔듯 강한 회복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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