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20세기의 신문과 잡지에는 이런 유의 광고 카피가 자주 실렸다. 블루투스 스피커 대신 가정용 전축이나 미니 컴포넌트형 오디오가 불티나듯 팔려 나가던 시대다. 하이파이(hi-fi)는 ‘하이 피델리티(high fidelity)’의 약자. 피델리티는 영어로 정확도, 충실도다. 따라서 하이파이 오디오란 원음에 충실하고 정확하게 음향을 재생하는 기기를 가리킨다.
그러나 ‘흥분과 감동의 하이파이 사운드!’만이 반드시 흥분과 감동을 주리라는 보장 따위는 없다. ‘나약과 무기력의 로파이(lo-fi) 사운드!’ 같은 광고 문구는 본 적 없지만 정확도와 충실도를 의도적으로 낮춘 ‘로 피델리티(low fidelity)’ 음악에 가슴 저릿하게 도취돼 본 경험이 많다. 그런 체험의 순간에 ‘…하이파이 사운드!’란 ‘잘 만들었으니(웰메이드이니) 믿고 많이들 사라’는 지극히 산업적 메시지로나 들릴 뿐이다.
#1. 요즘 더 로파이에 빠져 있다. 의도적 저품질 또는 저음질의 음악. 각종 플랫폼에 언제든 넘쳐나는 풀HD, 고음질, 웰메이드 등속에 지쳐서다. 영화나 음악을 감상한 뒤 ‘너무 좋네’ 대신 ‘잘 만들었네’라 평하는 자타의 거드름이 피로해서다. 로파이뿐 아니다. 긴장감 떨어지는 느림의 미학, 순진한 아마추어리즘의 매력이 요새 부쩍 내 가슴을 데운다. #2. 최근 만난 음악가 ‘파란노을’은 의도적 저품질에 꼭 들어맞는 음악을 구사한다. 그럼에도 세계 음악 마니아들의 평가로 순위를 정하는 미국 유명 사이트 ‘레이트 유어 뮤직’에서 그의 앨범은 2021년 종합 4위에 올라있다. 만나서 직접 들은 제작 과정은 들으며 예상했던 것보다 더 진정성 있는 로파이다. 보컬은 마이크가 없어서 스마트폰에 대고 노래 불러서 녹음했다. 적어도 수십만 원짜리 전기기타에 수만 원짜리 이펙터 페달을 연결해 냈을 법한 왜곡된 사운드마저 싸구려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무형으로 존재하는 가상 악기로 구현했다고 했다.
#3. 파란노을의 음악 장르는 ‘슈게이즈(shoegaze)’다. 무대 위에서 신발 끝(shoe)만 응시(gaze)하는 수줍다 못해 사회부적응자적인 무대 매너로 일관한 1980, 90년대 서구 밴드의 태도에서 유래했다. 그들이 발끝만 본 이유는 수줍어서만은 아니다. 꿈꾸는 듯 무기력하고 몽환적인 사운드에 맞춰 춤추거나 뛰어다니는 모양새가 더 이상한 데다, 그런 사운드를 내기 위해 기타 이펙터 페달을 미세하게 조작하려는 자세였다.
그러니까 기타마저 가상 악기로 구현하며 공연 무대에도 서본 적 없는 파란노을은 슈게이즈를 능가하는 ‘상(上)-슈게이즈’의 태도를 가진 음악가인 셈이다.
#4. 파란노을의 음악에서 로파이의 정점은 제작자의 마음가짐에 있다.
“제 음악을 좋게 들으셨나요? 솔직히 그럴 가치가 있는 음악도 아니고….”
“(가사는) 사춘기 감성, 중2병 감성이죠.”
“(제 음반의) 음향 믹스 상태는 믹스라 부를 수준도 안 되죠.”
“홍대 (인디) 신이 패배주의로 물들었던 시절이 제 로망이에요.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푸른새벽 같은 팀을 좋아해요.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저는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그래서 더 그때를 동경하나 봐요. 저는 과거에 머무는 사람을 싫어해요. 그러니까 저는 저를 싫어해요. 있지도 않은 추억에 빠져드는 사람….”
파란노을이 털어놓는 이야기들은 한 줄 한 줄, 그가 매우 좋아한다는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존재하지 않는 속편에 등장할 법한 외톨이 등장인물의 대사 같았다.
#5. 세계 대중음악사에서는 아예 하나의 장르로서 ‘로파이 뮤직’이 기록되기도 한다. 1970년대부터 꾸준히 전문 스튜디오가 아닌 집에서 녹음해 앨범을 낸 미국 음악가 R 스티비 무어(69)가 로파이·DIY 뮤직의 선구자, 홈리코딩의 대부라 불린다. ‘세바도’ ‘가이디드 바이 보이시즈’ ‘페이브먼트’ 같은 밴드의 만들다 만 것 같은 음악, 그 서걱거리는 음향과 낯선 공간감이 주는 감흥은 간단하지 않다. 산업 시스템에서 배제된, 또는 그것을 벗어나 ‘루저’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자유의 날개로 상상력을 펼치는 모든 예술가를 진정 사랑한다. 실패에서도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그 아찔한 낙하를 늘 응원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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