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외로움 담당 장관이 임명되었다. 영국인 중 900만 명이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다는, 외로움이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만큼 건강에 해롭다는 통계와 함께였다. 같은 해 우리나라에서도 외로움에 대한 여론조사가 있었다. 한국리서치가 실시한 이 조사에서 놀랍게도 응답자 중 26%가 거의 항상, 혹은 자주 외로움을 느낀다며 상시적 외로움을 호소했다.
외로움이란 뭘까? 해나 아렌트는 ‘자아를 잃어버린 상태,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태,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줄 동료가 없는 상태’라고 말한다. 분석은 명쾌했지만 개인적으론 이 시대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의 본질을 온전히 설명하진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한병철의 글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시대의 외로움이란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는 데서 생겨나는 건 아닐까.’
개인화된 세상에서 고통은 모두 사유화된다. 특히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각자도생의 세계에서 고통은 철저히 개인이 감당할 몫이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윤리를 뼈에 새겨 넣으며, 우리는 나의 세계에서 타자를 추방한다. 그 어느 시대보다 분주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타자의 말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다. 이런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타자의 미덕은 내게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 것이다.
호소할 수 없는 고통이 쌓이면 외로움이 된다. 각자의 입안에 갇힌 고통의 언어들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 그래서일까. 지금 이 세계에선 내 말에 귀 기울이는 존재가 있다는 그 자체로 행운이다. 내 말을 들어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치유된다. 그렇다. 고통을 함께하는 것이 공동체라면 한병철의 말처럼 당연히 ‘공동체는 경청하는 집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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