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그림자. 이파리 하나 없는 고목은 오히려 검은색에 가깝다. 하지만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푸른색이다. 푸른 그림자? 그림자라면 일반적으로 검은색으로 처리한다. 그런데 웬 푸른 그림자? 특이하다. 오지호(1905∼1982)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남향집’(1939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색채의 환희. 푸른 그림자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상설전시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호남 출신 오지호는 일본 유학 시절 커다란 깨달음을 얻는다. 섬나라 일본은 습기가 많은 기후이다. 그래서 옻칠이 발달했고 수묵화도 먹이 짙게 스미는 선염(渲染)을 특징으로 한다. 반면 명랑하면서도 사계가 분명한 반도의 기후는 늘 밝다. 자연환경의 특성은 사람의 됨됨이는 물론이고 그곳에서 생성된 예술작품도 다르게 한다. 한국과 일본의 미술은 다를 수밖에 없다. 바로 ‘풍토론’이다. 오지호의 민족주의적 예술은 이러한 깨달음에서 태어났다.
오지호는 인상주의 화가로 분류된다. 인상주의는 빛의 중요성을 화면에 담았다. 인상주의 시절에 이르러 화가들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튜브의 발명 덕분이다. 물감을 담은 용기의 발명은 화가들로 하여금 야외로 나갈 수 있게 했다. 자연 속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태양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빛의 비중은 날로 커졌다. 고정관념처럼 박혀 있던 고유색을 거부하고 화가 자신의 색깔을 선호했다. 그래서 ‘녹색 태양’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들은 색깔을 섞지 않고 원색 그대로 사용했다. 새로운 화풍의 출발이다. 물론 아놀드 하우저의 지적처럼 인상주의는 도시적 예술이다. 도시인의 시각으로 풍경을 해석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오지호는 개성에서 생활했다. 절친한 화우 김주경의 주선으로 개성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화가 자신의 고백처럼 개성 시절은 생애 최고로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당시 그는 생명의 약동을 화면에 즐겨 담았다. ‘사과밭’(1937년) 같은 걸작도 이 무렵 제작되었다. 밝고 명랑한 색채로 자연을 화면에 담았다. 이 무렵의 획기적인 사건은 바로 ‘오지호 김주경 2인 화집’(1938년)의 출판이다. 국내 최초의 원색화집이다. 수록된 작품이 대부분 남아 있지 않아 더욱 귀하게 여겨지는 지상(紙上) 미술관이다. 이 화집에 오지호는 자신의 예술론을 수록했고, 이는 예술적 선언이기도 했다. 바로 순수회화론이다.
‘남향집’을 살펴보자. 화면 가득 초가의 중심부가 배경으로 깔려 있고, 열린 문으로 붉은 옷을 입은 어린 딸이 문밖으로 나오고 있다. 문 앞에 문제의 거대한 고목 한 그루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 푸른 그림자가 나무와 함께 화면을 크게 점유한다. 그림자 옆은 하얀 강아지가 길게 늘어져 오수를 즐기고 있다. 돌계단 아래에 키 낮은 녹색 나무 한 그루가 있다. 단순한 구성이지만 화면 중앙에 붉은 옷, 검은 나무와 푸른 그림자 등 경쾌하면서도 신선한 빛의 율동을 느끼게 한다. 대상을 이렇듯 클로즈업하여 의미 부여하는 형식, 1930년대 화풍으로는 대담한 시도라 할 수 있다. ‘남향집’의 소재와 같은 초가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도 남아 있어 참고가 된다.
오지호는 광주화단의 대부로 우뚝 자리 잡았다. 그의 생애 후반부는 몇 가지 특기사항으로 기록된다. 무엇보다 6·25전쟁 시기에 지리산 빨치산 체험과 감옥생활을 했다는 점, 4·19혁명 당시 활동으로 군사 쿠데타 이후 감옥생활을 또 했다는 점 등이다. 현실과 거리를 두고 은사처럼 살 것 같지만 오지호에게서 지사(志士) 풍모를 읽게 한다. 그는 추상회화를 공격했고, 피카소의 존재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한글 전용에 반대하여 국한문 겸용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동시에 국어운동에 헌신하여 저술 작업을 하기도 했다. 국어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개인전을 열 정도였다. 화가의 또 다른 면모다. 오지호 앨범에 말을 타고 있는 사진이 있다. 승마는 오지호의 취미생활이었다. 호남화단의 대부는 이렇듯 독특한 장면들을 연출했다.
한국어의 특징 가운데 색깔 이름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예컨대 노랗다는 누렇다에서 노리끼리하다까지 다채롭다. 빨간 마후라, 하얀 손수건, 푸른 하늘 등. 명사에 ‘답게’를 붙이면 부사가 된다. 까맣게, 노랗게, 파랗게 등. 이렇듯 색채 명칭이 발달한 한국어에 없는 명사가 있다. 바로 블루(blue)와 그린(green)이다. 그린을 ‘녹색’이라는 한자로 쓰지만 순우리말은 찾을 수 없다. 블루와 그린은 모두 파랑이다. 참고로 현재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하양이 아니고 파랑이다. 설문조사 결과다. 그런데 ‘그린’에 해당하는 순수 한국어가 없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남향집’은 한국인의 색채의식을 생각하게 한다. 푸른 그림자, 바로 이것이 던져주는 질문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색깔일까.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도 다 있다. 빛은 섞으면 섞을수록 하얗게 되는데, 사람이 만든 물감은 섞으면 섞을수록 까맣게 된다. 사람의 손길이 아직은 자연의 완전함에는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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