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한 번, 편의점에 가서 유통기한이 1994년 5월 1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찾아 모으는 남자가 있다. 파인애플을 좋아하는 여자친구가 4월 1일 만우절에 헤어지자고 해서 농담이 한 달만 가길 바라며, 농담이 아니었다면 본인의 생일인 5월 1일 그 통조림을 모조리 다 먹고 그녀를 잊기로 한 남자. 실연했을 땐 조깅을 해서 몸에 있는 수분을 다 빼내어 울 수 없게 하는 것이 좋다는 남자. 왕자웨이 감독의 ‘중경삼림’ 주인공 중 한 명인 사복 경찰 ‘하지무’(금성무·진청우)다.
‘중경삼림’은 중국으로 반환되기 전의 영국령 홍콩에서 제작되어 1994년 7월 현지에서 개봉했다. 한국에서는 1995년 9월에 개봉했으며 최근 극장에서 리마스터링 버전이 상영되고 있다. 도시 속의 스쳐 지나가는 관계들로 사랑과 실연, 작은 위로의 제스처들과 새로운 시작들을 이야기한 작품으로 한 시절을 풍미했다.
홍콩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나 시장통과 이 영화의 제목에 연관된 주상복합 건물인 청킹(중경)맨션 등을 보여주는데 크리스토퍼 도일과 유위강(류웨이창) 두 명의 촬영 감독이 빗물로 얼룩진 수채화 같은 몽환적인 촬영 기법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또 다른 주인공으로 나오는 왕페이가 부른 크랜베리스(The Cranberries)의 ‘Dreams’ 커버라든가 마마스 앤드 파파스(The Mamas & the Papas)가 부른 ‘California Dreamin’ 등의 사운드트랙으로 유명한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무’가 범인을 쫓다가 처음에는 “0.01cm”를 사이에 두고 지나간 여자가 있다. 노랑 가발에 비가 올지도 모르니 레인코트를 입고, 해가 날지도 모르니 선글라스를 쓴 마약 밀수업자(임청하·린칭샤)다. 밀수 작전을 수행하다 뒤통수를 맞고, 두목에게 1994년 5월 1일 유통기한이 새겨진 통조림을 문제 해결 기한 또는 사형 일자처럼 받아둔 여자다. 4월 30일 밤, 둘은 우연히 같은 술집에 흘러 들어가게 되어 만난다.
옴니버스로 이어지는 이 영화의 두 번째 이야기는 하지무가 또 0.01cm를 사이에 두고 지나간 여자 페이(왕페이)가 식당에서 단골손님인 경찰 663(양조위·량차오웨이)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663의 여자친구는 그 식당에 이별 통지서와 집 열쇠가 든 봉투를 맡기는데, 눈치를 챈 그는 급하지 않다며 찾아가지 않는다. 이 열쇠를 갖고 집이 비었을 때 찾아가기 시작한 페이는 조금씩 헤어진 연인의 흔적들을 지우며 집 안 청소와 분위기 전환을 한다. 지금 보면 가택 침입과 그 이상의 범죄를 벌이는 것인데, 처음 영화를 봤을 땐 몽유병 환자의 귀여움으로 덮을 수 있을 정도의 연출이다.
그때 그 시절 아련함이 느껴지는 영화다. 최근 홍콩 민주화 운동의 폭력 진압과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여행이 끊긴 상태라 더욱더 그렇다. 그곳 사람들의 자유와 행복, 안녕을 바라며 ‘중경삼림’을 다시 한번 보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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