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향년 90세로 선종한 정진석 추기경의 선종미사에서 염수정 추기경은 이렇게 추모했다. 독재정권 타도에 앞장섰던 김 추기경에 이어 한국의 두 번째 추기경이 된 고인은 몸을 낮추고 가난한 이들을 품었다. 그의 사목 표어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 모든 사람을 대등하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내놓겠다는 뜻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도였던 고인의 어머니 이복순 씨도 모든 것을 내주었던 분이다. 젖동냥을 다니는 이웃을 보면 언제든 젖을 물려주었다. 서울대 화학공학과에서 과학자의 꿈을 키워가던 외아들이 전쟁을 겪고 사제의 길을 가겠다고 했을 때도 주저 없이 허락했다. 1996년 사후엔 안구 기증을 했는데 고인은 어머니의 안구 적출 수술을 지켜보며 아낌없이 주고 떠나는 모습을 가슴에 새겼다. “엄마의 젖동냥에 담긴 뜻을 평생 마음에 두고 살았습니다.”
▷사제가 된 후로는 신앙의 내실화에 집중했다. 청주교구장 시절 충북 음성에 전국의 노숙인을 위한 복지 시설인 꽃동네 설립을 지원했다. “우리 교구 신부들도 가난뱅이인데 누가 누굴 돕느냐”며 반대가 많았지만 바지 하나를 18년간 입고, 여름에 선풍기도 틀지 않는 청빈한 고인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서울대교구장 시절 사목의 중심 주제는 ‘생명’이었다. 인간 배아줄기세포 연구엔 반대했으나 생명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난치병 환자들을 위한 성체줄기세포 연구엔 100억 원을 지원했다.
▷정치와 거리를 둔 배경엔 아픈 가족사도 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르고 월북해 북한 공업성 부상(차관)을 지낸 정원모 씨다. 아버지가 월북할 때 태중에 있었던 고인은 대학에 들어가 호적초본을 떼어 보고서야 이 사실을 알았다. 고인은 “남북 화해에 앞서 서로 참회하고 용서부터 구해야 한다”면서도 이산가족 상봉과 같은 인도주의적 교류엔 적극적이었다.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임하던 2007년 평양교구 재건에 힘썼고, 평양과 가까운 경기 파주에는 민족화해센터 ‘참회와 속죄의 성당’을 건립했다.
▷6·25전쟁 당시 바로 옆에서 자고 있던 육촌 동생이 폭사한 후부터 고인은 ‘내가 마지막 날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동아일보 인터뷰에서는 “많은 이들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열심히 갚으며 살고 싶다”고 했다. 그 바람대로 장기와 각막과 통장 잔액까지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주고 떠나며 니콜라오(산타클로스)는 선물처럼 작별 인사를 남겼다. “늘 행복하세요.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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