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암환자 150만 명 시대다. 집집마다 암환자 없는 집이 없을 정도이고 조금만 주변을 돌아보면 누가 암에 걸렸다더라 하는 소식을 자주 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까운 지인이나 친척이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어떻게 하냐며 걱정과 위로부터 한다. 그러나 막상 암환자들 중에는 주변과 연락을 끊고 지내는 분들이 많다. 왜 그런 걸까?
“주변에서 하도 이래라저래라 말이 많아서 그게 더 힘들어요.” 환자와 가족들을 힘들게 하는 것 중 하나는 타인이 그 고통을 너무 쉽게 규정하거나 지레짐작하고 동정하는 것이다. 나름 선의를 가지고 한 말이라지만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은 아닌 것 같다고들 말한다. 남들이 달려들어 내 몫의 슬픔을 그들의 잣대로 규정짓고 재단하려 할 때, 그것은 슬픔을 견뎌야 하는 사람에게 더 큰 슬픔이 되곤 한다.
우리나라에는 건강한 사람이 아픈 사람에게 병이나 건강관리에 대해 한마디쯤 할 수 있다는 이상한 믿음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상대를 간섭하고 통제하려는 방향으로 이어지곤 한다. 특히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하는 문화는 이런 마음을 더 부추긴다.
건강보조식품을 구입해 택배로 보내는 일, 무조건 잘될 거라는 ‘막가파’식 희망, 출처도 불분명한 정보성 충고, ‘어쩌다가 이렇게 됐냐’는 망언. 이 4종 세트는 상대방에게 최악이다. 특히 투병생활을 열심히 하면 잘될 거라는 비현실적인 낙관적 희망이 더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 결과가 좋지 못할 때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자책으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암환자와 그 가족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면 아주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다. 바로 침묵하는 것이다. 섣부른 위로보다는 침묵이 차라리 낫다. 건강한 나는 위로해주고 싶지만, 정작 아픈 상대방은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오히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말없이 당신 옆에서 끝까지 함께 있어주겠다는 마음가짐이다. 실제로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있어주는 사람들은 정말 몇 명 없다.
환자를 평소처럼 대해주고 돌봐주는 일. 암에 걸렸어도 변함없이 환자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주는 일. 늙고 병들고 힘없고 초라해도 환자와 끝까지 함께하는 일. 환자가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 달려가겠다는 마음가짐. 이런 것이 중요한 것 아닐까?
만일 누군가 “내일 병원에 가는데 같이 가줄래요?”라고 묻는다면, 만사를 불구하고 동행하기를 바란다. 당신이 그런 질문을 받지도 못했고 만사를 제쳐놓을 수도 없다면 당신이 그 상대에게 괜한 훈수를 둘 지분과 자격이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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