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독일어권을 대표하는 작곡가 브람스와 러시아를 대표하는 차이콥스키가 만난 것은 1888년 신년 첫날인 1월 1일, 독일 라이프치히에서였다. 당시 러시아 출신으로 차이콥스키의 친구이기도 했던 바이올리니스트 브로드스키가 라이프치히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브로드스키의 초대로 저녁시간에 그의 집에 찾아간 차이콥스키는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의 내성적인 성격을 잘 알고 있던 브로드스키가 다른 손님들도 초대한 사실을 숨겼던 것이다. 거실에 들어선 차이콥스키의 눈앞에는 세 사람이 브람스의 3중주를 연습하고 있었다. 브람스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차이콥스키는 노래하듯 차분하게 물었다고 브로드스키의 부인은 회상했다. “실례가 될까요?” 브람스의 답은 이랬다. “전혀요. 하지만 제 음악을 들으시려고요? 재미가 없을 텐데.” 이날 일기에 차이콥스키는 이렇게 썼다.
“브람스는 엄청나게 친절했다. 교만하지 않지만 눈에 띄게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유쾌한 기질을 타고났고, 유머는 쾌활했으며 가식이 없었다.”
그러나 브람스라는 인물이 마음에 들었던 것과 달리 차이콥스키는 그의 음악을 좋아할 수 없었다. 그 이유에 대해 차이콥스키는 일기에 꽤 길게 설명했다.
“이 거장의 음악에는 메마르고 차가우며 모호한 점이 있다. 러시아인의 시각에서 볼 때 브람스에게는 선율적인 창의성이 없다. 그의 음악적 관념은 바로 핵심을 말하지 않는다. 선율을 알아들을 만하다 싶을 때는 바로 휘저어버리곤 한다. ‘작곡가는 이해하기 어렵고 모호하게 작품을 써야 한다’는 듯이. 그가 가치 없는 작곡가라는 뜻이 아니다. 그의 스타일은 세련됐고 진부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에는 ‘아름다움’이 부족하다.”
휴식시간이 찾아왔고, 차이콥스키는 감상을 말해야 했다. 브로드스키 부인은 ‘분위기가 어색했다’고 회상했지만 차이콥스키 자신은 “빠르기에 대해 한두 마디 했는데 브람스가 마음에 들어 했다”고 일기에 썼다. 그 순간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북쪽 노르웨이의 거장 에드바르 그리그와 부인 니나였다.
차이콥스키는 ‘둘이 꼭 닮았다’면서 니나에 대해 “이렇게 지식이 풍부하고 학식 있는 여성을 만나본 적이 없다”고 탄복했다. 며칠 뒤 브로드스키는 차이콥스키와 그리그 부부만 집으로 초대했다. 그리그는 피아노를 쳤고 니나는 그리그의 가곡을 노래했다. 차이콥스키와 그리그는 정기적으로 안부를 묻는 친구가 되었다.
차이콥스키와 브람스는 이듬해 브람스의 고향인 함부르크에서 다시 만났다. 차이콥스키는 두 번째 서유럽 연주여행이었고 자신의 교향곡 5번을 지휘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브람스는 리허설을 참관했다가 그만 잠에 빠졌고, 리허설 후 차이콥스키를 만나서는 솔직하고도 가혹한 평을 내놓았다. 그래도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의 인간미에 대한 매료는 변하지 않았다.
그들이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의 생일은 5월 7일로 같다. 두 ‘5월의 아이’는 세상을 떠난 뒤에도 늘 연주가들의 주요 연주 레퍼토리를 제공해 주었다. 올해 5월의 대한민국에서도 마찬가지다.
13∼16일에는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전예은 작곡의 오페라 ‘브람스’가 공연된다. 실제 브람스가 쓴 선율들이 여럿 삽입될 예정이다. 1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체임버홀에서는 2021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의 일환으로 피아니스트 문지영,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첼리스트 조영창이 브람스의 피아노 3중주 1번을 연주한다.
11일에는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에스메 콰르텟이 차이콥스키의 ‘노래성’이 두드러지는 현악 4중주 1번을 연주한다. 톨스토이가 눈물을 흘리게 했다는 ‘안단테 칸타빌레’가 2악장에 들어 있는 곡이다.
예술가는 고독하지만 위대한 예술은 교류에서 탄생한다. 어릴 때부터 전 유럽을 돌아다닌 모차르트가 음악사상 빛나는 금자탑을 쌓아올렸고, 독일 서부 본에서 태어나 프랑스식 이름 ‘루이’로 불렸던 베토벤은 독일어권 동남쪽의 빈으로 이주해 자신의 천분(天分)을 발휘했다.
오늘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많은 예술가들의 발이 묶여 있다. 찬란한 예술적 교류의 시기가 어서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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