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 고리’(이재영 옮김·창비·2011년)는 단 네 권의 소설로 위대한 현대 독일문학의 반열에 오른 W G 제발트의 세 번째 소설이다. 1992년 어느 여름, 고대 왕국의 터였던 영국 동남부 지방을 도보 여행한 사람의 사색기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나’의 발길이 닿는 곳곳마다 문명이 남긴 폐허의 현장이다. 17세기 의사 토머스 브라운의 두개골이 소장된 병원, 오래전 쇠락한 쏘머레이톤 저택, 노퍽 들판에 남아 있는 화장(火葬)의 잔해. 하지만 ‘나’의 눈이 닿고 있는 곳은 그 너머 인간의 아득한 심연이다.
이 소설에 ‘덧없음’이라는 정서가 짙게 깔린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과 무관하지 않다. 1944년 독일에서 태어난 제발트는 전쟁을 직접 겪지는 않았으나 독문학을 전공하면서 유대인 학살이라는 과거를 몹시 민감하게 사유했고, 영국으로의 자발적 망명을 선택했다. 그렇기에 제발트에게 역사는 점차 진보하거나 조금씩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별안간 하강하고 무상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토성의 고리’가 토성으로 인해 파괴되고 남은 위성의 아주 작은 파편들이라면, 이 소설은 인간의 잔혹한 폭력으로 인해 부서진 잔해들이 남긴 흔적이다.
그런데 그 흔적은 이상하게 아름답다. 비극의 끔찍함을 일일이 묘사하는 대신 파괴된 느릅나무 숲, 대규모로 번식하는 청어들, 끊임없이 실을 잣는 누에와 같이 언뜻 무관해 보이는 자연이 짓고 있는 무표정을 배치하기 때문일까. 이를테면 19세기에 쏘머레이톤 저택이 얼마나 화려하고 융성했는지 그려진 다음에는, 스러져버린 저택에 외롭게 남은 중국 메추라기 한 마리가 문득 등장해 몰락의 빈자리를 채운다. “치매에 걸린 것이 분명한 그 새는 뒤돌아설 때마다 도대체 어떻게 자신이 이런 암담한 상황에 빠지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곤 했다.”
서로 무관하게 떨어져 있는 것들도 가느다란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 ‘나’가 마주하는 사소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것들도 거대한 역사와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 질긴 관계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아연해진다. “역사의 심연들은 그런 식이다. 모든 것이 역사 속에 뒤섞여 있고 그 속을 들여다보려 하면 소름이 끼치고 현기증이 난다.”(‘공중전과 문학’·이경진 옮김·문학동네·2013년)
왜 이토록 현기증이 나는 걸까? 어쩌면 로마의 희극 시인 테렌티우스가 남긴 유명한 구절이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에 관한 일은 무엇이든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Homo sum; humani nihil a me alienum puto).” 이것은 물론 따뜻하고 순진한 휴머니즘이 아닐 것이다. 그저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엄격하게 바라본 자의 냉철한 사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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