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검찰총장, 상처 입은 조직부터 통합해야
검찰 중립과 수사 독립 지킨 이명재 전 총장 교훈
안으로 공정한 인사, 밖으로 공정한 법집행 필요
원칙 지키는 희생과 헌신의 좁고 험한 길 가야
2002년 6월의 어느 여름날 오후. 대검찰청 청사 8층의 검찰총장 집무실은 단출하다 못해 썰렁했다. 넓은 방의 한쪽 벽을 차지한 책장과 장식장은 비어 있었고, 커다란 책상 위도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유명 작가의 그림이나 글씨도 변변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 흔히 보는 책상 위 가족사진이나 장식장의 기념사진 같은 개인 물품도 없었다. 취임한 지 6개월 된 총장 집무실은 밝고 화려한 대신 어둑하고 무거운 적막감으로 채워져 있었다. 집무실 소파에는 양복 윗저고리를 단정히 입은 채 꼿꼿이 앉아 있는 노신사가 있었다. 이명재 검찰총장이었다. 싸야 할 짐도 없고 옷 채비도 되어 있으니 그는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임기 말에는 권력형 비리를 일컫는 이른바 ‘게이트’가 유난히 많았다. ‘이용호’ ‘정현준’ ‘진승현’ 게이트가 잇따르며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이 줄줄이 검찰청 포토라인을 거쳐 구치소로 향했다. 각종 게이트로 정권은 레임덕에 시달렸다. 그해 12월 치러질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당시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 진영은 사사건건 부딪쳤다. 작은 일도 선거와 연관되면 큰 사건으로 부풀려지기 일쑤였고, 당시 속된 말로 ‘하수종말처리장’ 격이라던 검찰로 떠넘겨졌다. 검찰의 사정은 참담했다. 권력형 비리를 시원하게 수사해 내지도 못했고, 검찰 고위 간부들이 비리를 감쌌다는 봐주기 의혹까지 불거졌다. 국민들의 시선은 불신을 넘어 혐오에 가까웠고, 검사들 스스로도 검사인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검찰을 떠났던 이명재 변호사가 구원투수로 불려와 검찰총장에 임명됐다.
임명 배경과 집무실 풍경이 말해주듯 그의 재임 10개월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청와대의 뜻과 달리 자신을 임명해준 대통령의 두 아들을 구속했고, 한솥밥을 먹던 전임 검찰총장과 고검장을 기소하는 악역도 피할 수 없었다. 청와대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여야 정치권은 총장에게 누구 편이냐고 다그쳤다.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말로 총장을 공격하는 내부자도 있었다. 대선을 코앞에 둔 정치권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따질 생각이 없었다. 정파적 이익을 위해 그때그때 편리한 대로 검찰을 이용하거나 겁박하려 들었다.
그의 말수를 더욱 줄어들게 만든 것은 김대업의 ‘병풍(兵風) 사건’이었다. 이회창 후보 장남의 병역 면제를 둘러싼 정치공작 사건이었다. 김대업이 제기한 의혹은 거짓으로 드러났지만 권력 편을 들지 않은 검찰에 대한 정치적 외풍은 거세게 불었다.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된 그가 외롭게 버티고 앉아 바람막이가 되어주지 않았다면 그때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수사의 독립은 무너졌을 것이다. 그의 원칙과 자세는 분명했고, 그런 총장을 권력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해 11월, 서울지검에서 일어난 피의자 사망사건의 책임을 지고 그는 미련 없이 총장 자리를 떠났다.
“무사는 얼어 죽어도 곁불을 쬐지 않는다. 태산같이 의연하되 누운 풀처럼 겸손하라”던 이 전 총장의 당부는 아직도 많은 검찰 후배들의 마음속에 숙연함으로 남아 있다. 평소 그는 수사 대상인 피의자에게도 합리적인 설득과 겸손한 자세로 다가갔다. 자신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 직책을 활용한 일도 없었다. 검찰 내에선 세(勢)를 키우거나 파벌을 형성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많은 후배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지만 스스로는 고독했다. 그가 보여준 고독한 결단과 원칙을 지키기 위한 희생과 헌신의 자세는 검찰총장이 무엇을 해야 하는 자리인지 깨닫게 한다.
차기 검찰총장으로 김오수 전 법무부 차관이 지명됐다. 검찰과의 관계가 최악에 가까운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총장으로서 그가 가야 할 길은 좁고 험한 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너진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광복 후 검찰이 겪어온 70년 영욕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총장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편 가르기로 깊은 상처를 입은 검찰조직을 통합하고 갈등을 치유하며 구성원들의 사기를 되살릴 특단의 노력이 필요하다. 안으로는 능력과 성과에 따른 공정한 인사가, 밖으로는 권력과 금력에 흔들리지 않는 공정한 법집행이 필요하다. 이는 검찰총장이 버티고 앉아 정치적 외풍을 막는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줄 때 가능한 일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희생과 헌신 없이 가치 있는 것은 얻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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