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지난달 말 워싱턴포스트의 단독 보도를 통해 처음으로 그 윤곽을 드러냈다. 백악관 대변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내용을 확인해 줬고,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이 잇달아 북핵의 외교적 해결을 강조하고 나섰다. 당국자들이 한결같이 “계속 조율 중”이라며 함구했던 내용인데, 공식 발표가 아닌 언론 누설로 일부가 공개됐다. 이것도 바이든식 간접접근 전략 아닐까 싶다.
새 정책이 나오면 뭐든 핑계 삼아 도발을 벼르던 북한도 미국의 거듭된 접촉 제안에 일단 “잘 접수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미국의 설명 먼저 들어보는 게 순서일 텐데 만날지 말지부터 따져보겠다는 태도가 고약하지만, 그간의 무반응에 비하면 그나마 긍정적 신호로 읽힌다.
미국 당국자들은 ‘눈금 매기듯 정밀하게(calibrated) 자로 재듯 신중하게(measured) 음정 맞추듯 조절된(modulated)’ 실용적 접근법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트럼프 시절의 ‘빅딜 아니면 노딜’식 일괄 타결과도, 오바마 시절의 ‘불량배와는 상종 못해’식 전략적 인내와도 다르다고 한다. 언론을 통해선 싱가포르 합의도, 단계적 해법도 수용할 수 있다는 얘기까지 흘려보낸다.
아무리 정교한 접근법이라도 그 성패는 북한이 얼마나 호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만큼 상대의 주먹 쥔 손가락부터 하나씩 펴겠다는 신중한 태도지만, 교착상태를 타개할 뚜렷한 유인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니 오바마식 전략적 인내와 다를 바 없는 ‘전략적 관리’ 아니겠느냐는 얘기도 벌써 나온다.
북한은 지금 도발을 통한 위기 조성과 극적인 협상 전환이라는 상투적 전술의 재가동 시기만 저울질하는 듯 공격적 자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외교적 접근 이면에는 억지와 제재 방안이 정교하게 준비돼 있음을 북한도 알고 있다. 특히 전방위 대북 압박엔 결국 중국도 손들 수밖에 없을 것임을 4년 전의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배운 바 있다.
북한이 살 길은 결국 대화에 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과는 다른 협상을 해야 한다. 바이든식 접근법이 트럼프와 다른 가장 분명한 차이는 톱다운 담판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바이든은 북-미 정상회담을 “불량배에게 정당성만 부여한 TV용 쇼”라고 비판했다. 실무협상부터 차근차근 밟아가며 성과가 나오기 전까지 정상회담은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대화가 시작돼도 북한 협상팀은 으레 그랬듯 모든 걸 정상 간 담판으로 넘기자고 고집할 공산이 크다. 신하 된 자는 외교를 할 수 없다는 전근대적 인신무외교(人臣無外交) 규범이 여전히 작동하는 북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간 북한 협상대표에게 재량권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었다. “비핵화 얘기를 꺼내면 그들은 ‘위원장 동지가 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만 했다. 김정은 외엔 비핵화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앤드루 김) “그들은 무수한 기회를 잡는 대신 장애물 찾기에 몰두하며 2년을 낭비했다.”(스티븐 비건)
김정은 앞에선 오금도 못 펴는 협상대표로는 어떤 대화도 시간 끌기에 그칠 것이다. 김정은이 진정 의지가 있다면 여동생 김여정을 협상대표로 보내는 것이 그나마 남은 유일한 방법이다. 김여정에게 대미·대남 업무를 맡겼다지만 지금 그의 역할이라곤 온갖 험한 막말을 쏟아내는 것뿐이다. 적어도 김정은과 대화가 가능한 김여정이 나온다면 미국도 걸맞은 카운터파트를 곧바로 물색할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