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주차장에서 탄 아파트 엘리베이터 문이 1층 로비에서 열렸을 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주민 한 명이 엘리베이터 안을 살짝 기웃거렸다. “타셔도 돼요”라며 기자가 안쪽으로 한 발 물러서자 반색하며 올라탄 그가 마스크를 쓱 내려 보이며 한 말. “저 백신 접종 완료했어요.”
기자가 사는 아파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1년 넘게 한 번에 한 명씩(혹은 한 가정)만 엘리베이터를 타게 해왔다. 습관처럼 몸에 밴 이 규정도 백신 접종자가 많아지면서 흐지부지되는 분위기다. 코로나19 감염 위험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이웃의 한마디는 일상의 정상화를 실감케 해준 한 장면이었다.
미국은 이제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백신 부국’이다. 한 달 전만 해도 예약 잡기가 힘들었던 접종센터들은 한산해졌다. 예약 없이도 쓱 들어가 5분 만에 맞고 나올 수 있는 약국도 많아졌다. 2차 접종까지 끝내고 한숨 돌린 부모들은 12∼15세 자녀들에게 백신을 맞히느라 다시 분주해졌다. 맥줏집과 바는 자정까지 북적거린다.
국내 코로나19를 잡은 미국의 시선은 이제 바깥으로 향하고 있다. 백신을 구하려 아우성치는 해외 국가들의 지원 요청이 워싱턴으로 밀려들고 있는 것. 조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주지사들과의 면담 자리에서 “전 세계 리더의 40%가 백신 지원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각국의 사정은 모두 절박하다. 인도와 브라질은 급증하는 사망자 수를 앞세워 도움을 호소하고, 일본은 도쿄 올림픽 개최 필요성을 주장한다. 캐나다와 멕시코는 미국과 국경을 맞댄 이웃 국가다. 의료 환경이 열악한 저개발 국가들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백신이라는 실탄 제공은 미국이 글로벌 영향력과 리더십을 되찾아올 수 있는 결정적 기회다. 바이든 대통령은 앞서 취임 100일 연설에서 “미국이 다른 나라들의 백신 무기고가 되겠다”고 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 세계 민주주의의 무기고’ 역할을 했다며 백신도 그렇게 풀겠다는 뜻을 강조했다.
초기에 백신의 자국 이기주의 비판에 직면했던 바이든 행정부가 받는 해외 지원 압박도 커지고 있다. 뒤늦게 6000만 회 분량의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해외에 제공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는 대형 화재 현장에 눈물 몇 방울 뿌리는 정도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미국이 백신의 지식재산권 유예를 지지한다는 방침을 밝힌 것은 미국의 백신 정책 전환을 확인하는 획기적인 결단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이 역시 세계무역기구(WTO) 164개 회원국 전체가 동의하지 않으면 실현 불가능한 데다 기술과 원료가 없는 대다수 국가들에는 어차피 그림의 떡이다. 미국이 이런 한계까지 전략적으로 계산하고 생색내기에 나선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은 백신의 해외 지원을 놓고도 전략적 판단을 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무기 대량생산과 유럽 지원을 바탕으로 글로벌 주도권을 거머쥐며 국제사회의 판도를 바꿨던 역사가 재현되기를 기대할 것이다. “미국이 돌아왔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선언을 현실화하기 위해 보다 큰 외교안보의 틀에서 글로벌 백신 정책을 짤 것이다. 이에 따라 지원의 우선순위와 기준이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그리는 이런 거대한 판 속에서 미국의 백신 정책에 동참하는 일은 우리에게 던져진 또 다른 외교적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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