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약 60km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 멜리호보. 의사이자 작가인 안톤 체호프(1860∼1904)가 1892년부터 7년 반 동안 거주했던 곳이다. 여기서 그는 희곡 ‘갈매기’를 비롯한 여러 편의 대표작들을 집필했고 진료소를 열어 주민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지식인의 덕목은 인간의 도리
현재 멜리호보에는 자택, 진료소, 소극장 등 여러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체호프 문학 기념관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평생 의학과 문학을 같이 품었던 체호프의 족적은 세기말 러시아를 넘어 오늘의 우리에게도 지식인의 본질에 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종합해 보건대 체호프는 진보와 과학을 믿었고 지식인의 열정을 믿었다. 그러나 집단으로서의 러시아 지식인의 말뿐인 도덕주의와 무능한 이상주의는 경멸했다. “나는 우리의 지식인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위선적이고 거룩한 척하고 신경질적이고 무례하고 게으릅니다.”
그는 이념적 편 가르기와 패거리 정치도 거부했다. “저는 자유주의자도 아니고 보수주의자도 아니고 점진주의자도 아니고 수도사도 아니고 무관심주의자도 아닙니다. 꼬리표와 라벨은 편견입니다.”
그는 허황된 담론과 영웅주의 대신 얼핏 너무나도 소박하고 평범하게 들리는 덕목을 지식인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체호프가 말하는 지식인은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며, 타인의 재산을 존중하며, 빚은 반드시 갚으며,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지식인은 건강한 몸과 건강한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지식인은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처신해야 하며 법을 준수해야 한다. 이 정도면 지식인의 덕목이라기보다 그냥 인간의 도리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의사는 질병 아닌 사람을 치료
반면, 의사 체호프의 활동은 이런 소소한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다. 모스크바대 의학부를 졸업하고 수련의로 근무하기 시작한 이후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그가 의료 및 사회봉사 영역에 남긴 업적은 실로 거대했다. 체호프는 “의사는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다”를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고 “의사란 모름지기 손가락 끝까지 인도적이어야 한다”는 신념에 문자 그대로 투신했다. 그는 의료봉사는 물론 학교와 공공 도서관 설립에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1890년에는 악명 높은 유배지 사할린섬에 가서 고아들과 매춘 여성을 위한 기관 설립을 지원했으며 모스크바로 돌아와서는 빈민 구호활동에 매진했다. 멜리호보 거주 시절에는 인근 지역에 창궐한 콜레라 방역에 앞장섰고 새벽 5시부터 진료소에 몰려오는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20세기 중반까지도 멜리호보 주민들이 체호프를 작가가 아닌 ‘의사 선생님’으로 기억하는 이유다.
의사 체호프가 인간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 경감에 집중했다면 작가 체호프는 인간 조건에 스며들어 있는 실존적 고통에 주목했다. 체호프의 단편들은 잔잔하고 간결하다. 뚜렷한 플롯조차 없을 때도 많다. 그는 고독하고 불안하고 어리석고 무능하고 소심한 사람들을 그렸다. 고상한 사람, 비루한 사람, 다정한 사람, 무정한 사람도 그렸다. 그 모든 인물들이 아파하고 갈팡질팡하고 슬퍼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것은 지식인이건 무식쟁이건, 부자건 가난뱅이건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결핍과 쇠락이다.
‘지루한 이야기’의 주인공 니콜라이 교수는 의학계의 거물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려왔다. 그런데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둔 지금 그는 거대한 허무 앞에서 괴로워한다. 그 누구보다 성실하고 고결하게 살아온 그의 인생과 그가 헌신한 학문에는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다. 그는 고통스러운 성찰 끝에 그것이 ‘공통 이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모든 생각과 감정, 그리고 내가 삼라만상과 관련하여 정립하는 개념들에는 모든 것을 하나의 전체로 엮어주는 공통적인 무언가가 빠져 있다. 그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의 삶이 결여하는 것이 과연 저 어마어마하게 들리는 ‘공통 이념’일까?
신념이 집념인 시절의 영웅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우회적으로 이 질문에 답을 제공한다. 평생 사랑 없는 결혼생활 속에서 역시 사랑 없는 습관적 외도만 일삼아온 중년의 바람둥이 구로프는 우연히 만난 젊은 유부녀 안나에게 사랑과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그들은 누추한 모텔 방에서 기약 없는 미래를 아쉬워하며 밀회를 거듭한다. 그들의 그렇고 그런 밀회는 어느 날 구로프가 모텔방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갑자기 달라진다. “머리는 벌써 희끗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최근 몇 년 새에 이토록 늙고 시들어 버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의 두 손이 얹혀 있는 따스한 어깨가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는 지금은 이토록 따스하고 아름답지만 필경 그의 삶처럼 벌써 퇴색과 피폐의 시작점에 가까워지고 있을 이 여인의 삶에 연민을 느꼈다.” 이 대목에서 소설은 연애 소설도 불륜 소설도 아닌 다른 차원의 기록으로 넘어가고 비루한 불륜남 구로프는 부지불식간에 저자 체호프의 대변자가 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쇠락을 거쳐 소멸한다. 예외는 없다. 이 엄정한 현실에서 연민은 한 유한한 인간이 다른 유한한 동료 인간에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거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체호프가 수백 편의 단편을 통해 전하려 했던 메시지의 핵심이다.
체호프는 젊은 시절부터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을 당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했던 것은 당시 불치병으로 간주되던 폐결핵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각혈한 것은 의과대학 졸업 즈음이라 전해진다. 그러니까 마흔넷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그는 거의 성인 시절 전체를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와 더불어 살아야 했다는 얘기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봉사는 인간 체호프가 자신의 필멸에 응답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체호프는 대부분의 자칭 타칭 지식인들이 세상을 당장 바꿀 듯 구호를 외쳐대던 시절에 행동으로써 존재의 증거를 남겼다. 신념을 집념으로 변질시킨 사람들이 넘쳐나던 시절에 신념을 철학으로 승화시켰다. 평론가 존 머리는 체호프를 ‘우리 시대의 영웅’이라 불렀다. 맞다. 그는 영웅주의를 거부한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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