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유재동]‘마스크 자율규제’라는 낯선 실험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5월 25일 03시 00분


타인의 접종 여부 몰라 마스크 계속 착용
‘백신 강국’ 美의 다음 과제는 신뢰사회 회복

유재동 뉴욕 특파원
유재동 뉴욕 특파원
미국에서 두 번째 백신 주사를 맞은 지 딱 2주가 됐다. 이제 연방정부와 뉴욕주 당국의 권고에 따라 공식적으로 마스크를 벗을 자유가 생겼다. 그러나 언감생심. 실내는커녕 바깥에서도 사람들이 모인 곳을 지날 때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멀리 돌아서 간다. 얼마 전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안에 마스크 안 쓴 사람이 있는 걸 발견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짧은 순간에도 ‘탈까 말까’ 하는 망설임이 그렇게 격렬하게 일어날 줄 몰랐다.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다. 그동안 마스크를 마치 속옷처럼 여기고 착용해온 수많은 미국인이 상당한 혼란을 느낀다. 막상 쓰라고 할 때는 그렇게도 말을 안 듣던 사람들이 이제는 벗어도 된다는데 또 망설이는 모습을 보인다. 마스크 ‘탈의’에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은 아무래도 마트 계산원이나 의료진 같은 대면 접촉 근로자들이다. 한 동네 상점은 ‘No mask, No entry, No exception’(마스크 안 쓰면 예외 없이 출입금지)이라는 경고 문구를 1년 넘게 지금까지도 내걸고 있다. 맨해튼 거리에 나가 봐도 ‘백신을 맞았으면 맨얼굴로 들어와도 된다’고 써 붙인 가게는 쉽게 찾기 힘들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이런 상황을 ‘새로운 아너 시스템(honor system)’이라고 규정했다. 일종의 무감독 시험 같은 것인데, 사회 구성원들이 알아서 규칙을 지킨다고 전제하는 자율 규제를 뜻한다. ‘백신 접종자는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는 당국의 지침도 ‘백신 접종자만 마스크를 벗을 것’이라는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문제는 그게 지켜지느냐다. 사회 구성원 간 신뢰가 계속 떨어지고 있는 미국은 작년에도 마스크를 쓰는 자와 안 쓰는 자로 나라 전체가 두 쪽으로 갈라진 기억을 갖고 있다. ‘노 마스크’ 이웃을 믿도록 강요하는 이번 지침은 그래서 더욱 논란이 많다. 백신 접종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규제를 없애면 무책임하게 마스크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들만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전대미문의 팬데믹은 각국의 저력과 한계를 동시에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초기에는 남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고 마스크를 챙겨 쓰는 공동체 의식의 유무가 승부를 갈랐다면, 시간이 지나면서는 결국 이 비극을 끝낼 ‘게임 체인저’ 백신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훨씬 더 중요해졌다. 첫 번째 시험을 망치고도 두 번째에 대박을 치며 반전에 성공한 미국은 다시 첫 번째와 비슷한 난관에 직면해 있다. 타인에 대한 신뢰, 분열과 갈등을 접고 통합으로 나가려는 의지가 길고 긴 바이러스와의 싸움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지만, 결승선을 앞에 둔 미국의 사정은 그리 녹록지 않다. “미국에 가장 큰 위협은 팬데믹이 아니라 극심한 사회 분열”이라는 게 작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밀그럼이 본보 인터뷰에서 내린 진단이다.

물론 미국의 마스크 ‘해제령’은 팬데믹에서 먼저 승기를 잡았다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집단면역의 순간을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많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정치적 결단을 내린 것이라는 분석도 만만치 않다. 백신 접종을 거부·유보하는 비율이 30∼40%에 이르고, 국민들의 마스크 피로도가 거의 한계치에 다다른 한국도 언젠가는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하게 될지 모른다. 그때가 오면 우리는 백신을 맞았다고 마음 놓고 마스크를 벗을 수 있을까. 불신과 괴담, 편 가르기를 멈추고 성숙한 집단의 의지를 발휘할 수 있을지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또 한 번 묻고 있다.

유재동 뉴욕 특파원 jarrett@donga.com
#마스크#자율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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