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도 일종의 힘겨루기를 한다. 그리고 이기는 쪽이 주도권을 쥔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팔레스타인과 관련해 주로 한쪽 얘기만 우리의 귀에 들리는 것은 그래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역사의 희생자임을 누누이 강조한다. 나치의 손에 수백만 명이 죽었으니 맞는 소리다. 그들의 수난에 관한 영화, 문학작품, 기록물은 정말이지 넘쳐난다.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서양은 물론이고 동양에서도 그들의 수난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그 덕이다. 이것이 스토리의 힘이다. 그런데 그 스토리에 가려진 다른 스토리가 있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고향에서 쫓겨나 지난 70여 년을 난민 혹은 식민 상태로 살아가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스토리가 그렇다. 그들은 현실에서도 쫓겨나고 스토리에서도 쫓겨난다.
세계 언론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을 전쟁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이 아니다. 전쟁이란 엇비슷한 힘을 가진 국가나 집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한쪽이 다른 쪽을 몇십 배, 몇백 배, 아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할 때는 전쟁이 아니다. 상대를 높은 담으로 둘러싸 거대한 수용소로 만들어 놓고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최첨단 무기로 공격하는 것이 전쟁일 수는 없다.
그것을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용어의 남용이며 이스라엘의 스토리에 굴복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한 야만적 행위는 덜 중요해지고 그것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지워진다. 이것이 스토리의 폭력이다. 니체의 말처럼 “사실은 없고 해석만 있다”. 해석 전쟁, 스토리 전쟁인 셈이다. 세상은 나치 때문에 죽은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는 기억하겠지만, 이스라엘의 야만적인 폭력에 죽은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스토리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과 눈물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도 그들처럼 식민주의 폭력에 속수무책이던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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