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보여줄 수 있다면[내가 만난 名문장]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5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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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하나지만 진실은 사람 수만큼이다.

―미우라 시온 ‘내가 이야기하기 시작한 그는’ 중

권남희 일본 문학 번역가
권남희 일본 문학 번역가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노견(老犬)인 나무와 산책을 하다가 벌어진 일이다. 나무는 눈이 보이지 않아서 종종 마주 보고 걸었다. 그래서 한 손은 목줄을 잡고, 다른 손은 손바닥을 어정쩡하게 편 채로 다녀야 했다. 뒷짐을 지고 소풍 가는 어린이집 아이들 인솔하는 선생님처럼 뒷걸음질로 걷곤 했다. 그날도 그렇게 인적 드문 산책로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뒷짐을 진 손바닥에 사람 엉덩이 같은 게 만져졌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어떤 여성의 엉덩이였다. 그는 뒤돌아서서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고, 나는 손을 뒤로하고 뒷걸음질로 가고 있어서 본의 아니게 엉덩이를 만지게 된 것이다. “엄마야!” 하는 비명과 함께 사과하고 갈 길 가는 걸로 끝이었지만, 이 일은 오랫동안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만약 성별이 달랐더라면, 그래서 그 사람이 성추행범으로 신고한다면 이것은 ‘빼박’(빼도 박도 못한다)이다. 내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그가 있는지도 몰랐고 내 손에 그의 엉덩이가 들어온 것이지만, 시각장애 개를 핑계대고 뒷짐 진 척하고 엉덩이를 만졌다고 상대가 우기면 그만이다. 폐쇄회로(CC)TV도 없고 증인도 없는 곳에서 아마 고스란히 뒤집어쓰게 되겠지. 이래서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생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이 존재할까.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것, 본 것, 심지어 상상한 것이 사실이라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미술 시간에 자리 이동하지 않고 그린 아그리파 같은 것. 그래서 사실은 하나인데 진실은 수도 없이 많아진다. 가끔 마음에 지퍼가 달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오해가 생길 때마다 활짝 열어서 서로 확인할 수 있게.

권남희 일본 문학 번역가


#노견#나무#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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