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치매가 두렵다. 죽음은 그만큼 두렵지 않다. 죽음에 대해 잘 알지 못하므로 그에 대해 정교하게 두려워하기도 어렵다. 의식이 소멸한 죽음 상태에서는 기쁠 것도 슬플 것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치매는 다르다. 인지 기능은 현격히 저하되었는데, 의식은 소멸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시작된다.
플로리앙 젤레르 감독의 영화 ‘더 파더’는 치매 노인 이야기다. 우리는 치매 노인에 관련해 슬프고 힘든 이야기들을 이미 많이 알고 있다. 자기 삶을 멸시해 온 사람들도 정작 치매 노인을 보면, 자신이 누려온 삶의 위엄을 새삼 깨닫는다. 가능한 한 자기 의식주와 생리현상을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며, 되도록 민폐를 끼치는 혹 덩어리가 되지 않고자 하는 의지는 인간의 삶을 위엄 있게 만든다. 치매를 겪는다는 것은 그런 삶의 위엄을 땅에 내려놓는 일이다.
치매 노인은 대체로 기억이 온전하지 않고,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하며, 절제되지 않은 언행을 일삼는다. 자기 한 몸을 건사하지 못하다가 결국 돌보아 주는 주변 사람들을 지치게 한다. 급기야는 하나, 둘, 가족마저 곁을 떠나 버린다. ‘더 파더’도 이러한 익숙한 치매 에피소드를 나열한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안소니.
안소니가 가장 아끼는 물건은 시계다. 바니타스(vanitas) 회화가 보여주듯이, 시계는 삶의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안소니는 한정 자원인 그 아까운 시간을 집 마련하는 일에 투자했다. 현대 한국인들이 아파트를 사기 위하여 막대한 시간을 쓰는 것처럼. 그 안온한 집에서 오래오래 살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어느 날 안소니에게 치매가 온다. 그리고 치매 노인의 일상이 시작된다. 안소니의 통제 불가능한 언행에 지친 방문 간병인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나 버린다. 이제 안소니는 인생을 바쳐 마련한 자기 집을 떠나 낯선 요양 병동에서 죽어가게 될 것이다.
현실에도 괴로운 일들이 넘쳐나는데, 굳이 영화에서까지 이런 에피소드를 보아야 할까. ‘더 파더’는 치매 환자의 일상 에피소드 이상의 것을 담고 있기에 볼 가치가 있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와 마지막 시퀀스를 비교해 보자. 영화 시작부. 아버지를 방문하러 또각또각 길을 걸어오는 딸의 발걸음을 따라 오페라 음악이 흐른다. 마침내 딸이 아버지 안소니를 만나는 순간 그 음악은 “객관적으로” 울려 퍼지던 음악이 아니라, 안소니가 헤드폰을 쓰고 듣고 있던 음악이었음이 판명된다.
치매란 헤드폰을 쓰고 음악을 듣고 있으면서 남들도 그 음악을 듣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상태다. 인지 기능이 저하된 치매 노인에게 일상은 헤드폰 속 음악처럼 흐른다. 이 음악 좋지 않니? 무슨 음악 말씀이죠? 이 음악 소리 너무 크지 않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요. 음악 소리 볼륨 좀 키워 봐. 무슨 음악 소리요? 방금 일어난 일상을 왜 너는 모르는 척하니? 영화는 자신이 치매인 줄 모르는 치매 환자의 일상을 충실하게 따라간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기억의 다리가 불타버린 일상, 자신과 타인을 잇는 인지의 다리가 부서져 버린 일상을 보여준다. 그 파편화된 세계를 견디지 못한 딸은 아버지를 요양원에 두고 파리로 떠나 버린다.
마침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안소니는 자기 집이 아니라 요양원 침대에서 눈을 뜬다. 눈을 뜬 안소니에게 간호사는 딸이 보내준 엽서를 보여준다. 그 엽서의 뒷면에는 꽃그림이 화려하다. 봄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여인이 꽃바구니를 안고 있는 로마 시대 프레스코화. 그 엽서를 읽은 뒤, 안소니는 자기 인생의 잎은 다 떨어졌다며, 삶의 겨울이 왔다며, 집에 가고 싶다며 울음을 터뜨린다. 이 슬프지만 냉정한 현실 아래로 음악이 나직하게 “객관적으로” 흐른다. 간호사는 안소니를 달랜다. 화창한 날은 오래가지 않아요. 함께 산책이나 해요.
흐느끼는 안소니는 단순히 감정 조절에 실패한 치매 노인이 아니다. 마침내 자신이 치매임을 깨달은 치매 노인이다. 안소니의 울음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자각한 자의 울음이다. 안소니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처럼 묻는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나는 누구인가. 자신은 그 누구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는 메타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 ‘더 파더’의 핵심이다.
삶의 행복을 겪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행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두 배로 행복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도 ‘로슈포르의 숙녀들, 25년 후’(1993년)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행복의 기억은 아마도 여전히 행복일 거라고. 그러나 치매는 어떤가. 치매를 겪으면서 자신이 치매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바람직한가. 자신이 한때 누리던 존엄을 잃은 상태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메타 의식은 상황의 개선에 공헌할 때나 유효하다. 자기 상황을 객관화할 때 비로소 개선책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개선으로도 이르지 못할 자의식을 갖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가. 치매는 자의식마저 공포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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