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쿠웨이트 최북단에 세워진 미군기지에서 며칠간 머물 기회가 있었다. 4년여의 이라크 파병을 마치고 철군하는 자이툰 부대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주둔지(이라크 아르빌)를 떠나온 자이툰 부대원들이 귀국 전까지 임시 거처로 지낸 기지의 시설과 규모는 입이 떡 벌어질 만했다.
약 330만 m²(약 100만 평) 규모의 기지는 대형 에어컨이 설치된 수백 동의 숙영텐트를 비롯해 샤워실과 헬스장, PC방, 극장, 군마트(PX), 패스트푸드점 등이 갖춰져 소도시를 방불케 했다. 기지 내 대형 식당에선 호텔 뷔페 못지않은 풍성한 식단이 매 끼니 제공됐다. 다양한 육류와 신선한 야채 과일을 비롯해 저지방 요거트와 디저트, 음료까지 즐길 수 있었다. 한국군 등 다국적군 장병들이 취향대로 메뉴를 골라 식사하는 데 전혀 불편이 없었다. 고된 임무에 지친 장병들에게 양질의 식사는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최근 군 내 부실 급식 사태를 보면서 당시의 기억이 극과 극으로 오버랩됐다. 미국과의 국력과 국방비 차이를 감안해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연이어 폭로된 부실 급식은 믿기지 않는 수준이다. 30년 전 필자가 군 복무할 때나 접했던 허접한 식단이 아들뻘 병사들에게 대물림된다는 사실에 자괴감마저 들었다. “이게 세계 10위 경제대국 군대의 밥상이냐”, “있던 애국심도 달아나겠다”는 비난이 쏟아질 만했다.
군은 늑장 대응과 미봉책으로 일관하다 호된 여론의 역풍을 맞고서야 국방부 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이 공개 사과하고, 부랴부랴 대책을 발표하는 뒷북 행태를 보였다. 최근엔 급식 상황 점검차 부대를 찾은 야당 의원들에게 삼겹살이 가득한 ‘특식’을 버젓이 내놓아 실태 감추기에 급급한 게 아니냐는 빈축을 사기도 했다.
이번 사태는 첨단무기 도입 등 ‘외양 가꾸기’에 치중하면서 장병 처우는 후진적 수준을 답습하는 우리 군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민간 조리원 및 조리병 증원과 식당 외주화, 병사·장교식당 통합 등 갖은 대책이 나오지만 병사 1인당 한 끼 급식비(2930원)가 고등학생(3571원)에도 못 미치는 상황을 개선하지 않으면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다.
연간 52조 원의 국방비를 쓰면서 병사 식단을 이 수준까지 방치한 것은 군의 명백한 직무유기다. 성난 여론에 뒤늦게 내년에 급식 예산의 증액(일 1만1000원)을 약속했지만 과연 적정한 수준인지 더 세심히 따져봐야 한다.
병사의 기본권을 무시하는 시대착오적 관행도 여전히 병영에 똬리를 틀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훈련병의 샤워·배변 시간을 통제하다 여론의 뭇매를 맞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이 2021년 한국군의 현실이다. 병사를 ‘부속품’이나 재소자처럼 취급하는 발상 자체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고 필자는 본다.
어디 그뿐인가. 술에 취해 별 트집을 잡아서 병사에게 폭언과 폭행을 가한 간부들이 잇달아 적발되는가 하면 그 과정에서 사건을 축소하려고 한 정황까지 드러나는 등 병영 부조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육군 상무대 소속 병사가 유격훈련 중 인대가 파열됐지만 부대의 묵살과 군 병원의 오진으로 걸음조차 걷지 못할 정도로 악화된 사건이 뒤늦게 드러나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과거 중증 질환에 걸린 병사들이 오진과 지휘관의 무관심으로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속출하자 의료 시스템의 대수술을 공언한 군의 다짐이 무색한 지경이다.
군 안팎에선 화려한 외형에 가려져 속은 곪아가는 병영의 총체적 위기 징후가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오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군은 병영 부조리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일부의 문제로 넘기거나 뒤늦은 사과와 땜질식 처방만 반복하는 실정이다.
‘사후약방문’을 거듭하는 군을 믿고 자식을 맡길 국민이 얼마나 될까. 평시에도 신뢰받지 못하는 군을 위기 시에 어떻게 믿겠느냐는 비판을 군 수뇌부는 곱씹어 봐야 한다. 병사를 제대로 처우하고 훈련시키는 양병(養兵)이 부실하면 국가 위기에 대처해야 하는 용병(用兵)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군 지휘부는 ‘말로만 대책’이 아닌 병영 부조리의 근본 원인을 진단하고 일소할 수 있는 처방을 조속히 내놓길 바란다. 장병을 홀대하는 군대는 절대로 선진강군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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