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원인 모를 단기기억상실증이 유행하는 사회. 아리스라는 남자에게 유일하게 남은 기억은 이름도 집 주소도 아닌, 한입 베어 문 사과의 맛이에요. 그는 새로운 경험들을 통해 기억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에 참여해요. 자전거 타기, 무도장에서 춤추기, 스트립 바에서 즐기기, 낯선 여자와 섹스하기 같은 미션을 수행하고 모든 순간을 즉석사진으로 남겨 앨범으로 만들어야 하는 그는 마침 똑같은 프로그램에 속한 안나라는 여자를 마주하게 되는데….
어때요? 지난달 국내 개봉한 그리스-폴란드 영화 ‘애플’의 줄거리예요. 엄청 흥미진진한 공상과학영화 같지요? 아니에요. 졸려요. 글로 쓴 내용보다 영상이 때론 백배 더 지루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일깨워주는 작품이지요. 제목 단어인 ‘애플’은 유명 스마트폰 브랜드이기도 하니, 매 순간을 폰으로 사진 찍어 저장함으로써 기억 기능을 스마트폰에 이양해 버린 현대인의 자화상이 풍자적으로 겹치기도 하지요.
무표정을 한 채 주어진 미션을 마치 형벌인 양 수행해 나가는 아리스는 점차 묘한 모습을 보여요. 기억상실증이라는 사람이 이웃집 개를 대번에 알아보고는 금세 또 모르는 체하지요. 기억상실을 가장해 뼈아픈 과거의 어떤 기억과 애써 결별하려는 듯 보이기도 한다고요(요즘엔 이런 걸 ‘기억상실 호소인’이라 한다지요).
그래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어쩌면 이 순간 우리에게도 절실한 건 재난지원금이 아니라 단기기억상실증이에요. 부동산 폭등, 코인 반 토막…. 잊고 싶다 못해 구안와사까지 올 지경인 우리의 타는 마음도 모른 채 힘 있고 돈 있는 인간들은 이런 ‘아사리판’ 대한민국을 ‘다이내믹 코리아’라고 크리에이티브하게 부르더군요. 하긴, 똥이나 된장이나.
[2] 그럼 10억 원이 된 아파트를 도무지 사지 못하는 우린 정녕 영혼의 떠돌이로 남게 될까요? 이럴 땐 넷플릭스 영화 ‘중력을 거스르는 남자’(2019년)가 신경쇠약 직전의 우리를 구슬프게 웅변해 주어요. 태어날 때부터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아 몸이 둥둥 뜨는 주인공 소년 오스카르. 어릴 때부터 엄마는 그에게 쇳덩이를 채운 조끼를 입혀 마치 땅 위를 정상적으로 걷는 것처럼 위장해요. 어느 날 티 없이 맑은 소녀 아가타를 만난 오스카르는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이후 아가타가 내어준 분홍색 배낭을 중력 삼아 등에 짊어진 채 소녀와 행복한 하루하루를 함께해요. 하지만 오스카르의 정체가 동네에 밝혀질까 두려워한 엄마는 아들을 데리고 세상과 단절된 두메산골로 들어가는데….
어때요? 이번엔 ‘애플’보다 가일층 재미난 이야기 같죠? 아니에요. 제목에 또 속았어요. 중력이란 단어는 철학적 은유라고요. 인간으로 태어나 짊어져야 하는 모든 종류의 관계, 의무, 갈등을 뜻하거나, 아예 존재 자체의 질량처럼도 여겨지지요. 결국 주인공은 세상과의 진정한 관계 맺기에 실패한 채 세상을 부유해요.
[3] 맞아요. 영화 속 은유는 나와 우리의 존재를 넌지시 말해주곤 해요. 바닷가 우편배달부가 시인을 만나 자신의 삶과 감정을 직시하게 된다는 내용의 영화 ‘일 포스티노’(1996년), 기억나시지요? 주인공 마리오는 위대한 시인 네루다에게 물어요. “시(詩)가 뭔가요?” 네루다는 답해요. “메타포(은유)!” 영화예술도 그래요. 좋은 영화는 알게 모르게 이 순간의 우리와 공동체를 은유하지요.
그리스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해괴망측한 영화 ‘더 랍스터’(2015년)가 그래요. 가까운 미래. 서로에게 완벽한 이성(異性)을 찾지 못하고 홀로 남겨진 사람들은 커플 메이킹 호텔에 강제로 머무르게 되어요. 여기서 45일간 제 짝을 찾지 못하면 개돼지 같은 동물로 변하는 천형을 받게 되어요. 호텔에 수용되면 수음(手淫)을 하지 못하도록 오른손을 결박당해요. 오로지 이성과의 섹스만 용납되니까요. 그런데 근시란 이유로 아내에게 버림받은 데이비드란 남자가 호텔로 와요. 그는 자신이 짝을 찾지 못할 경우 랍스터가 되기를 희망하지요. 랍스터는 100년 넘게 장수하고, 귀족처럼 푸른 피를 가졌으며, 평생 번식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죠.
차라리 랍스터가 되고 싶은 남자라. 맞아요. 요즘처럼 집 사기 어렵고 연애하기 어렵고 결혼하기 어렵고 자식 낳기 어려운 젊은이들이라면, 아예 랍스터가 되어버리는 편이 속 편하겠다는 자포자기를 할지도 모르겠어요. 하긴, 어떤 분이 약속하신 적도 있잖아요? 가재 붕어 개구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 꼭 만들어 주시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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