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아버지에게는 안 좋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암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치료에도 불구하고 암이 나빠지거나 더 이상 치료법이 없어서 임종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인데 환자에게 이를 비밀로 해달라는 것이다. 환자 본인이 안 좋은 소식을 직접 알게 되면 많이 힘들어 할 수 있다는 게 주된 이유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다만 문제는 연명의료에 대한 결정이다. 의료 현장에는 소위 ‘무의미한 연명의료’라는 것이 있다. 치료에도 불구하고 말기 질환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빠져 고통스러운 시간만 더 연장하는 시술을 무의미한 연명의료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법으로는 임종의 순간이 임박해올 때 인공호흡기나 심폐소생술 등을 할지 말지는 미리 정해 놓아야만 한다.
하지만 법과 사람의 기본값이 다르다. 우리나라 법에는 연명의료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모두 연명의료를 원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즉 법적으로는 연명의료를 하겠다는 것이 기본값이다. 하지만 환자나 그 가족에게는 연명의료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고통이므로 고통을 피하기 위해 논의조차 하지 않는 것이 기본값이다. 연명의료에 대한 이 ‘기본값’이 서로 다르니 현장에서는 충돌이 일어난다. 고통스러울 것 같아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스란히 고통을 당해야 하는 모순적 상황이 벌어진다.
사실 환자나 가족들은 겪어본 적이 없기에 연명의료가 어떤 것이고 중환자실이 어떤 곳인지 잘 알지 못한다. 담당의사가 중환자실행 여부를 결정해서 연명의료 계획서에 서명하라고 하는데, 생각조차 하기 싫은 상황에서 잘 모르는 채로 내 목숨을 어떻게 할지 서명하게 되는 셈이다.
이런 이유로 예전에 의대 학생들과 간단한 연구를 한 적이 있었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연명의료가 무엇이고 중환자실 치료에 대해 알려주는 2분짜리 교육용 동영상을 만들었다. 이 동영상을 시청한 전후로 연명의료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지를 살펴보는 간단한 설문조사 연구였다. 하지만 동영상을 본 환자들이 펑펑 우는 바람에 연구를 진행하지 못하고 중단해야만 했다. 환자들은 동영상을 보고 자신이 중환자실에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몹시 괴로워했다.
중환자실에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이토록 고통스러운데, 현실에서는 연명의료에 대한 결정을 미리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명의료를 원한다’는 기본값이 작동하여 중환자실 치료를 받아야만 한다. 연명의료 결정법은 임종기 환자에게 고통을 주지 말자는 좋은 취지로 제정되었지만 법과 현장에는 여전히 괴리가 있다. 불필요한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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