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폭력의 씨앗[클래식의 품격/인아영의 책갈피]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15일 03시 00분


인아영 문학평론가
인아영 문학평론가
“SF가 흑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한때는 ‘유일한’ 흑인 여성 SF 작가였던 옥타비아 버틀러(1947∼2006)가 대중 강연에서 가장 자주 들었던 질문이라고 한다. 지금이야 독보적인 대가로 기억되지만, 당시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이었던 미국 SF계에서 버틀러는 자신의 작업과 그 쓸모를 끊임없이 정당화해야만 했다. 그런 버틀러가 17세기부터 이어지는 아프리카 역사를 바탕으로 젠더, 인종, 사랑, 폭력이 교차하는 광대한 세계를 그린 매혹적이고 경이로운 소설이 ‘와일드 시드’(조호근 옮김, 비채, 2019년)이다.

‘와일드 시드’는 아프리카의 1690년, 1741년, 1840년을 각각 배경으로 삼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도로는 3700년 동안 다른 사람을 죽이고 그 몸에 기거하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슈퍼휴먼이자 흑인 남성이다. 자신의 아이를 번식, 개량하여 더 강인한 일족을 이루려는 지배욕을 가진 그는 17세기 아프리카 이보 마을에서 아냥우라는 흑인 여성을 만난다. 아냥우는 자신의 세포를 바꾸어 신체, 젠더, 나이, 종이 다른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초능력을 지닌 야생종(wild seed)이다. 아냥우의 특별함을 감지한 도로는 그녀를 아내로 맞아 더 강한 종족을 만들고자 한다. “그는 이 여자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 이 여자의 피가 섞이면 어떤 혈통이든 강해질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강해질 것이다.”

이 소설의 흥미로운 점은 도로와 아냥우가 섹슈얼리티와 폭력, 사랑과 착취가 어지럽게 뒤엉겨 있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저지르는 잔인함과 권력에 대한 야욕을 가진 도로. 그리고 자손에 대한 깊은 사랑과 치유 능력을 지닌 아냥우. 둘은 서로의 초능력을 이해하는 유일한 상대이기에 서로에게 이끌리면서도 불편해하고 순종과 저항을 반복한다. 도로는 더 강한 종족을 위해 자신의 아들인 아이작과 아냥우를 강제로 결혼시키고 아냥우는 도로가 자신을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워하며 도망가기도 한다.

강한 종족에 집착하고 번식을 통해 식민지를 넓히는 도로는 서구의 우생학과 노예제를 그대로 재현하는 대체 역사를 보여준다. 그러나 도로와 아냥우는 단순한 주인-노예 관계가 아니다. 아냥우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압도하는 강력한 남성에게 억압당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폭력을 대물림하지 않는다. 자신을 착취해 지배력을 확장하는 도로의 요구에 더 이상 순종하지 않으려는 아냥우의 힘은 지배-피지배라는 패턴의 반복을 벗어난 타인과의 교감에서 온다. 누군가가 SF가 흑인에게, 혹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묻는다면, 인종과 젠더의 폭력에서 살아남는 강인하고 유연한 흑인 여성의 한 전형을 만들어낸 ‘와일드 시드’ 소개로 갈음하고 싶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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