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그제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한국의 디지털성범죄’ 보고서를 냈다. 우리나라만 콕 집어 약 2년에 걸쳐 디지털성범죄 실태와 문제점을 연구했다고 한다. 정보기술(IT) 발달과 함께 디지털성범죄 문제도 앞서가고 있다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피해자 12명 심층 인터뷰 내용은 충격적이다. 한 여성은 전 남자친구가 자신의 얼굴을 합성한 나체 사진을 집 주소, 전화번호와 함께 인터넷에 올린 사실을 알고 삭제 요청서를 작성했지만 그 사이 10개가 새로 올라왔다고 했다. 회사의 유부남 상사가 선물이라며 준 탁상시계가 알고 보니 촬영 기기가 장착된 몰래카메라였던 사례도 있다. 한 달 반 동안 상사의 스마트폰으로 피해 여성의 침실이 생중계됐다고 한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따르면 이 같은 디지털성범죄 관련 신고 건수는 2020년 3만5603건으로 5년 만에 10배 가까이로 늘었다. 그러나 2019년 디지털성범죄 사건의 불기소율은 43.5%에 이르고, 지난해 불법 촬영으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의 73%가 집행유예나 벌금형에 그쳤다. 검사가 “벌금 500만 원도 안 나온다”며 합의를 유도하는 사례까지 있다고 한다. 이런 가벼운 처벌과 뒤처진 인식이 디지털성범죄를 확산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신속한 삭제가 어렵다는 점이다. 불법 촬영물을 삭제하게 하려면 민사소송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형사재판부터 끝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어이가 없다. 휴먼라이츠워치는 “피해자가 법원에 신고하면 사진·촬영물을 12시간 내 신속히 삭제하도록 강제하는 ‘긴급 삭제명령’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는 긴급 삭제명령 제도를 당장 도입하고, 영상 삭제 등 피해 복구비용을 가해자에게 손쉽게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내놔야 한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 강화 원칙도 필요하다. “칼이나 흉기만 안 썼지, 한 사람의 정체성과 정신에 대한 살인”이라는 피해 여성들의 토로를 외면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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