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버드’와 웨인 티보의 핑크색 하늘[움직이는 미술]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18일 03시 00분


웨인 티보 ‘파크 플레이스’, 1995년.
웨인 티보 ‘파크 플레이스’, 1995년.
송화선 신동아 기자
송화선 신동아 기자
그레타 거위그 감독 영화 ‘레이디 버드’에는 ‘새크라멘토’라는 지명이 자주 등장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이 도시는 주인공 레이디 버드(시어셔 로넌)의 고향이자, 그가 못 견디게 벗어나고 싶어 하는 평범함의 다른 이름이다. 머리를 핑크색으로 물들인 이 고교 졸업반 여학생은 어느 날 엄마에게 선언한다. “나는 캘리포니아가 싫어. 대학은 꼭 동부로 갈 거야. 문화가 있는 뉴욕 같은 곳. 적어도 코네티컷이나 뉴햄프셔로.”

병원에서 야간 당직을 도맡아 하며 간신히 살림을 꾸리고 있는 간호사 엄마가 듣기엔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우리 집은 사립대 학비를 대줄 만한 형편이 안 돼. 게다가 너는 공부도 잘 못하잖아. 근처 대학을 가렴.”

차 안에서 시작된 모녀의 다툼은, 딸이 달리는 차문을 열고 뛰어내려버림으로써 극적으로 마무리된다. 돌발 행동으로 팔을 다친 레이디 버드는 핑크색 깁스를 한 채 새크라멘토 거리를 돌아다닌다. 그의 머리 위엔 놀랍게도 이 소녀의 머리카락, 그리고 팔 위 깁스와 같은 색 하늘이 펼쳐져 있다. 태양빛을 듬뿍 머금어 마치 핑크색 호수처럼 보이는 새크라멘토의 하늘. 문득 화가 웨인 티보(1920∼)의 그림에서 바로 저런 하늘색을 봤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티보는 케이크, 파이, 아이스크림 등 달콤한 디저트 연작으로 유명한 화가다. 동시에 자신이 거의 평생에 걸쳐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 도시 풍경도 즐겨 그렸다. 정물화든, 풍경화든 그의 작품을 특징짓는 건 따뜻한 파스텔톤 색채다.

영화 ‘레이디 버드’를 보며 떠올린 바로 그 작품 ‘파크 플레이스’(1995년)는 캔버스 거의 절반을 온화한 핑크색으로 채웠다. 그 아래로 연푸른색 고층 건물과 녹색 언덕이 어우러진다. 화가가 사용한 색은 하나같이 평화롭고 목가적인데, 가파르게 경사진 도로가 화면을 좌우로 분할하며 긴장감을 자아낸다. 이 그림은 일견 평화로운 듯 보이지만 실은 숱한 고민과 아픔이 잠복돼 있는 레이디 버드의 사춘기를 연상시킨다.

“제발 우리에게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게 하소서. 스무 살 시절 도토리가 톡, 톡 떨어져 내리는 학교 뒷숲에 시집을 끼고 앉아서 그들은 말하곤 했었다.” 역시 영화 레이디 버드를 보다 떠오른 공지영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한 대목이다. 이 책은 ‘무슨 일이든 일어났으면, 그것이 비록 나쁜 일일지라도’를 외치던 소녀들이 ‘이젠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말아 달라고 빌고 싶다’고 말하는 나이가 된 시점에서 출발한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건지 모른다. 핑크색을 잃고, 마음에 가득하던 불안함에 대한 동경을 잃는 것.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레이디 버드는 고교 생활을 마무리하며, 화사한 핑크색이던 자기 방 벽을 흰색으로 덧칠한다. 그리고 잿빛 하늘이 펼쳐진 뉴욕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토록 답답해하던 새크라멘토 바깥에서 그는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송화선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레이디 버드#웨인 티보#핑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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