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원수]후진국형 붕괴 참사와 ‘철거왕’ 업체의 그림자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21일 03시 00분


2013년 검찰 수사 때 “사업 안 뺏겨” 호언
현금 로비와 재하청 막을 근본 대책 나와야

정원수 사회부장
정원수 사회부장
2013년 7월 다원그룹의 이모 회장(당시 43세)이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은신처 근처에서 체포됐다. 전관 변호사를 통해 검찰에 불구속 수사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4개월 넘게 잠적했고, 검찰이 잠복 끝에 이 회장을 길거리에서 붙잡았다. 당시 전국 재개발·재건축 사업의 철거 공사 90% 이상을 독점 수주해 ‘철거왕’으로 불리던 이 회장은 약 1000억 원의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됐다.

검찰은 정치인과 지방자치단체장 등으로 의심되는 로비 대상의 영문 이름 이니셜과 금액이 적힌 휴대용저장장치(USB메모리)를 입수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일부 지방의회 관계자 등을 제외하고는 끝까지 로비 내역을 함구했다. 쇼핑백에 현금을 담아 건네던 방식이어서 이 회장의 구체적인 진술 없이는 수사가 진척되기 어려운 구조였다고 한다.

고교 졸업 후 악명 높았던 ‘철거깡패’ 용역업체 ‘적준’ 회장의 운전기사로 출발한 이 회장은 2000년대 이후 다원그룹을 10여 개 계열사를 거느린 회사로 키웠다. 그는 평소 “한 번에 현금 수억 원 이상을 벌 수 있다”며 철거 사업의 전망을 높게 봤다고 한다. 검찰 수사 때도 “5년이고 10년이고 견디면 철거 사업을 절대로 뺏기지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회장은 2015년 대법원에서 징역 5년을 확정받았지만 다원그룹은 아직 건재하다. 이 회장의 동생 2명이 이 회장과 같은 방식으로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다원그룹 계열사의 임원을 맡고 있던 이 회장의 동생 A 씨는 2007년 9, 11월 광주 동구 학동 일대 재개발구역의 철거업체 선정을 부탁하면서 6억5000만 원을 전달한 사실이 2011년 수사로 밝혀졌다. 조합 측과 친분이 있던 B 씨에게 현금을 건넨 것이다. 재개발조합 정비사업 설립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던 B 씨는 금품 수수 혐의로 2012년 징역 1년이 확정됐지만 출소 뒤 학동 재개발조합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해체계획서와는 정반대로 건물을 밑동부터 제거하는 철거로 9일 5층 건물이 도로 쪽으로 무너지면서 17명의 사상자를 낸 곳의 바로 옆 구역이다.

만연한 재개발·재건축 비리를 막기 위해 2009년 조합과 철거업체가 직접 계약을 할 수 없도록 ‘도시 및 주거환경 관리법’ 일부 조항이 개정됐다. 지금은 조합이 아닌 시공사가 철거업체와 직접 계약을 하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진 건 없다. 이주 대책과 석면 해체와 같은 용역들은 불법 하청, 재하청 구조로 진행되고, 여기에 다원그룹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 붕괴 참사를 수사 중인 경찰은 시공사와 계약한 한솔기업이 다원그룹과 한 몸처럼 움직이고, 철거 과정에 참여한 업체 최소 5곳이 다원그룹의 친인척이나 전직 직원 등이 운영하는 회사라는 점을 파악했다고 한다.

현금 로비가 통하면 철거업체는 거액의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 여기에 최대 10분의 1 수준으로 단가를 낮춰 불법 재하청을 주면 막대한 차익을 남긴다. 결국 철거 현장에서 안전은 뒷전으로 밀리고 속도전만 우선시된다. 경찰의 수사 책임자인 남구준 국가수사본부장이 최근 광주경찰청을 방문해 다원그룹 의혹 등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2013년 다원그룹에 대한 검찰의 1차 수사는 미완으로 끝났다. 경찰은 후진국형 붕괴 참사 뒤에 짙게 드리운 다원그룹의 그림자를 이번에 완전히 걷어내야 한다. 그것이 철거 공사의 부조리를 뿌리 뽑을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후진국형 붕괴 참사#철거왕#불법 재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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