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윤리적인가. 문재인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돌연 내게 던진 질문이다. 최근 유럽을 방문했던 문 대통령은 오스트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가톨릭의 가치가 평생 내 삶의 바탕을 이루었고, 정치인이 된 이후에도 높은 윤리의식을 지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어떤가. 솔직히 윤리적이다, 아니다 답하기가 두렵다.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나는 윤리적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실존적 질문을 받고 나면 대다수는 나와 비슷한 고민에 빠질 듯하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그냥 윤리의식도 아니고 ‘높은 윤리의식을 지켰다’고 공언했다.
대통령의 강철 멘털에 놀랄 때가 많았지만, 또 한 번 ‘졌다’. ‘높은 윤리의식을 지켰다’고 자랑하는 것 자체가 그렇지 않다는 뜻 아닌가. 이젠 공정 개혁 정의 법치에 이어 윤리까지 내로남불인가. 그가 정치인으로서, 대통령으로 높은 윤리는커녕 그냥 윤리도 지키지 못했다는 걸 한 페이지쯤 쓸 수 있다. 가깝게는 지난 주말의 검찰 중간간부 인사를 보라.
조국 추미애 박범계로 이어지는 비상식적인 법무부 장관들을 동원해 검찰총장을 비롯한 수뇌부를 친정권 인사로 물갈이한 데 이어 권력 근처라도 건드린 수사팀장들은 모조리 바꿔버렸다. 그러면서 정권에 아양을 떤 검사들에겐 떡고물을 안긴 게 이번 인사다.
민주화 이후 역대 다른 대통령들도 당연히 친정권 검찰을 원했다. 그래도 이만큼 대놓고 갈아엎진 못했다. 그건 대통령으로서의 윤리를 따지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염치가 걸렸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에도 문 대통령의 윤리의식을 비판하는 건 헛심을 빼는 일이다. 누가 뭐라든, 자기 생각을 바꿀 대통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문 대통령은 조국 추미애류의 인사들보다 강타자다. 조국 추미애 같은 사람들은 ‘내가 옳다’를 강변하기 위해 수많은 전선에서, 수많은 전쟁을 벌인다. 그러면 자신들에게도 피가 튀고, 얼룩이 묻는다. 그런데 대통령은 남이 뭐라든, 대꾸도 않고 내가 옳다고 생각(착각)하는 일을 벌인다. 세계가 뭐라든 김정은을 칭송한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높은 윤리의식’ 속에 살고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과 이성윤 서울고검장이 대체로 문 대통령과 비슷한 스타일이다. 이런 분들이 요란하게 여기저기 전선을 넓히는 사람들보다 더 무섭다.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않기에, 아니 아예 모르기에 누구보다 멘털이 강한 탓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스타일들을 찾아볼 수 있다. 조용히 자신만의 세계에 살면 남에게 별 피해를 안 주겠지만, 혹시라도 큰 자리를 맡으면 특유의 불통(不通)으로 주변을 힘들게 하고 일을 망칠 인사들이다.
그렇기에 검증이 중요한 것이다. 큰 자리에 가선 안 되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못 가도록 하는 절차다. 문 대통령에 대한 검증은 촛불의 소용돌이에 휩쓸려갔다. ‘광화문 대통령 시대’ ‘대토론회 개최’ ‘직접 언론에 브리핑’ ‘퇴근길 격의 없는 대화’를 외친 분이 이토록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내달릴 줄은 몰랐다.
내일이면 지지율 1위의 대선주자 윤석열 전 검찰총장도 검증대에 올라선다. 박근혜 문재인 후보에 대한 뼈아픈 검증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남을 검증하던 검사 윤석열도 나라의 미래를 위한 검증인 만큼 달게 받아야 할 것이다.
다만 X파일류의 ‘지라시 검증’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오세훈 서울시장에 대한 생태탕 총공세의 실패에서 보듯, 더 이상 ‘카더라 통신’에 좌우될 유권자들이 아니다. 윤 전 총장에 대한 검증은 본인보다 아내와 장모 문제에 집중될 수도 있다. 하지만 현명한 유권자들은 그의 결혼 전 문제인지, 결혼 이후 문제인지, 또 문 대통령 딸 아들 문제처럼 집권 후에도 불거질 일인지를 구분해서 볼 것이다.
그럼에도 검증은 평생 검사로 살아온 그가 대한민국을 경영할 능력이 있는가, 소통과 탕평으로 세계 10위권 국가를 미래로 이끌 드림팀을 구성할 준비가 돼 있느냐에 집중돼야 마땅하다. 그런데 검증 결과 자격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어떨까? 대다수 중도·보수 유권자들은 이미 정권교체를 위한 전략적 선택에 나섰다. 그 절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대안 찾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내일 출마선언을 하는 윤석열이 겸허하고, 또 겸허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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